사망(Death) vs 죽을 운명(mortality)
사망(Death) vs 죽을 운명(mortality)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단순히 육신의 죽음이 아니고 사망의 과정이고, 생명이란 단순히 육신의 삶이 아니고 생명의 과정임을 살펴보았다. 씨-하나님은 흙-사람에게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련의 과정이 생명이고 사탄도 마찬가지로 영-씨로서 표면적으로 보면 똑 같은 과정을 거쳐 사람에게서 사탄의 열매를 추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망의 노선 안에 있으면 어느 과정에 있건 사망이고 생명의 노선 안에 있으면 육신이 죽더라도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된 진리다. 그래서 성경을 살펴보니 문맥상 육신이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육신의 죽음과 사망노선을 구분하지 않고 사망이라는 영어 단어 Death, dead나 die를 사용하였으나 문맥상 사망 노선 안에서 육신의 죽음과 생명노선 안에서의 육신의 죽음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 때는 ‘죽을 운명’이라는 mortal, 또는 mortality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여기서 ‘운명’이란 단어를 살펴보기로 하자. ‘운명’이란 누구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개를 만들었는데 개가 사람이 될 수 있는가? 없다. 운명이란 이런 개념이다. 운명이란 창조자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창조자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개가 사람이 되려면 개가 죽어서 사람에게 먹혀야 한다. 풀이 소가 될 수 있는가? 없다. 풀이 소가 되려면 풀은 소에게 먹혀야 한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자동차 공장에서 소형차를 만들었다고 하자, 이 소형차가 갑자기 중형차로 바뀔 수 있는가? 없다. 중형차가 되려면 용광로에 들어가서 해체된 다음 재창조되어야 한다. 똑 같은 원리다.
그런데 이것이 기적과 지혜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종교와 철학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 없다. 성경이 주는 계시는 사람이 영생하는 존재가 되려면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생을 위해 재창조되어야 한다. 죄가 있기 때문에도 거듭나야 하지만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재창조-거듭나야 한다.
‘그런즉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즉 사람의 몸은 옛 창조 안에서 ‘죽을 운명(mortality)’ 으로 창조되었고 새 창조 안에서 ‘죽지 않을 운명(immortality)’ 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운명이란 근원적인 것으로 중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운명이 전환되려면 창조적 전환, 곧 죽고 다시 재창조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죽지 않을 운명(immortality)’ 이란 단어는 하나님께만 사용하고 사람에게 사용할 때는 부활한 영적인 몸을 가리켜 사용한다.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나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딤전6:16)
이제 영원하신 왕 곧 죽지 아니하시고(immortal)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딤전 1:17)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Death)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고전15:54)
이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분께서는 사망(death)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life)과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딤후1:10)
참고 꾸준히 잘 행함으로 영광과 존귀와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갚으시고 (롬2:7)
그럼에도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죽지 않을 운명’ 이었는데 ‘죽을 운명’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죽지 않을 운명’이 ‘죽을 운명’으로 바뀐다는 논리는 말이 안되는 논리다. 운명이 어떻게 바뀌는가? 운명은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에 대하여 ‘죽을 운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왜 타락했는가? 이 운명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운명은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에게 ‘이는 네가 땅에 취하여 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신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만일 사람의 육신이 영생하게 되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서 육신이 죽게 되었다면 사람의 몸에 대하여 ‘죽을 운명(mortality)’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이 무조건 death, dead 또는 die 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생명 노선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죽을 운명(mortality)’ 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은 사람의 몸이 근원적으로 ‘죽을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mortal man)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겠느냐? 사람이 자기를 만드신 분보다 더 깨끗하겠느냐? (욥4:17)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의 죽을 몸(mortal body)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안에서 죄에게 순종하지 말고 (롬6:12)
그러나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는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의 죽을 몸(mortal bodies)도 살리시리라. (롬8:11)
살아 있는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death)에 넘겨짐은 예수님의 생명(life)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mortal flesh) 안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1)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mortality)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 (고후5:4)
위 구절 중에 로마서 6장 12절을 잠시 살펴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의 죽을 몸(mortal body)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안에서 죄에게 순종하지 말고 (롬6:12)
위 구절을 보면 우리 몸이 ‘죽지 않을 운명(immortal body)’ 이었는데 죄가 들어와 ‘죽을 운명(mortal body)’ 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차피 몸은 근원적으로 죽을 운명(mortal body) 이었는데 그 몸이 죄에게 종 노릇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가? 어떤 이들은 성경 어디에 사람의 몸이 죄와 관계없이 원래부터 죽게 되어있느냐고 묻는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그런 것을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하지 않은 것은 사람이 죽는 것은 너무도 상식적이고 당연하기 때문에 기록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먹어야 살고, 배설을 해야 살고, 숨을 쉬어야 산다.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죽게 되어 있다.(마4:6)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마4:7)
다음 성경 구절들은 사람의 몸이 근원적으로 ‘죽을 운명’에서 부활을 통해 ‘죽지 않을 운명’으로 전환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으리로다. (고전15:53)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Death)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고전15:54)
이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분께서는 사망(death)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life)과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딤후1:10)
사람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 무조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말한다. 또 로마서 8장 10절에서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해 죽었으나(the body is dead) 성령은 의로 인해 생명이 되시느니라’ 라는 구절을 이분법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하여 죄로 인해 몸이 죽는다고 말한다. 오호 통재라, 어찌 이렇게 다들 말씀에 대한 이해가 없는지!
로마서 8장 10절에서 그리스도인은 현재적(is)으로 죽어 있는 상태다. 실제로 그러면 우리 몸이 죄로 인해 죽었나? 죽지 않았다. 이것은 영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내 몸이 죄로 인해 죽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완성이 안된 것이고 더욱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훼손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말씀을 반대로 해석해보자, 예들 들어 '그리스도께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해 죽었으나'를 반대로 '그리스도께서 너희 밖에 계시면 몸은 의로 인해 살았으나'로 되어야 하는데 이것은 말이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몸은 죄로 인해 죽었으나’ 를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해석하는 것은 말씀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크다. 생명과 사망이라는 말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념이라면 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인류에게 배반당하고 죽으셨겠는가? 아무도 그분이 가시는 생명의 길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에 제시된 성경구절들은 생명노선 안에서 육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고 있다. ‘죽을 운명(mortality)’ 이었던 육신이 부활을 통해 ‘죽지 않을 운명(immortality)’ 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중에서 마지막 구절인 디모데후서 1장 10절을 살펴보자.
이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분께서는 사망(death)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life)과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딤후1:10)
디모데후서 1장 10절 말씀을 보면 우리 생각으로는 사망을 폐하였으니 대비되는 후속 구절은 ‘생명’이라는 한 단어만 쓰면 족하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성경은 ‘생명(life)’과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이라는 두 단어를 기록하고 있다. 모든 성경 기록은 단 한글자도 의미 없이 기록된 것이 없다. ‘생명(life)’과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은 다소 차이가 있다. 여기서 사망이란 사망노선이다. 즉 예수님은 사탄에게 승리함으로서 사망노선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노선을 열어 놓으셨다. 그 생명노선 안에서도 특히 몸이 ‘죽을 운명(mortal)’ 이었던 사람들에게 부활을 통해 ‘죽지 아니하는 운명(immortality)’ 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여기서 아담은 사람의 몸이 ‘죽을 운명(mortal)’ 때문에 선악과를 먹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고 모든 사람의 소망이 육체가 영생하는 것을 소망하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특별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과 죽지 아니함’이라는 생명노선 안에서의 몸의 부활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다. 대부분의 이단종파의 가르침을 보면 그 종파의 교주들이 신으로서 행세를 한다. 자칭 타칭 자신이 재림예수라고 하면서 자신의 육신은 죽지 않고 영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시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정체성이 폭로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근원을 모르고 여전히 사탄의 거짓아래 놓여 있다. 사탄은 지금도 이것을 먹는 날에 죽지 않는 신들이 될 것이란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창3:5)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람은 신이 아니고 사람이 되라는 하나님 말씀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신들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