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
19.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본래 몸이 죽도록 만드셨다면 자연적으로 죽게 될 몸을 굳이 예수님께서 죄 값을 치르고 몸을 대속하여 다시 부활시키는 것은 필요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원래 죽을 존재로 만드셨다면 몸이 죄의 삯인 사망을 이기고 일어나는 부활은 희극이 될 것이다.
이것도 결국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동일하게 보는데서 오는 오해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지 법리적인 희생물에 국한시키고 유기적인 헌물의 의미를 모르기 때문에 오는 현상이다.
또 사망이라는 말을 너무도 단순하게 육체적 죽음에 국한시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담 안에 있는 자를 죄와 범법들 가운데 죽었다고 한다.(엡2:1) 이것이 육체적 사망인가? 육체적 사망이 아니다. 성경은 영적 사망이든 육체적 사망이든 불의한 자의 부활이든 둘째 사망이든 다 사망으로 보고 있다. 사망의 노선 안에 있기 때문에 사망이라는 것이다. 생명노선 안에 있으면 모든 과정이 생명이다. 내 육신이 죽더라도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말은 아담으로 인해 인류가 사망노선으로 갔는데 생명노선을 회복시키셨다는 것이다. 사망 열차를 타고 있던 인류에게 생명 열차로 갈아 탈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인류는 사망열차를 타고 육체적 죽음과 불의한 자의 부활이라는 사망노선을 가다가 불호수라는 최종역으로 가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노선이 개척된 것이다. 생명열차를 타고 잠자는 죽음과 의로운 자의 부활이라는 정거장을 거쳐 새예루살렘이라는 최종역에 도착하는 노선이다.
원래 사람은 생명노선 안에서 생명의 연합을 위해 육신이 한 번은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지만 아담이 이 길을 이탈했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과의 전쟁에서 잃어버린 생명노선을 회복하려면 피 흘림이 필요한 것이다. 피 흘림 없는 전쟁의 승리는 없다. 예수님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죽기까지 생명노선을 지키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이것이 인류가 생명노선을 이탈한 대가이다. 대가 없는 승리는 없다.
예수님이 원래 하나님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이라고 알면 이것은 종교적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님이 일으키셨다고 했지 스스로 부활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담은 생명노선을 이탈한 자라면 예수님은 생명노선을 지키신 분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조건하에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인생의 위치를 지키었기에 생명노선 안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류의 보편적 구원자가 되신 것이고 우리도 그분과 같이 생명노선 안에서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인격의 승리, 이것은 피 흘림을 통한 대가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은혜이고 법리적인 대가이기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 피 흘릴 필요는 없다. 이것을 구약적 표현으로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한 희생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에만 그친다면 우리의 구원이 없는 것이다. 무죄가 영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희생물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헌물이 되어야 한다. 희생물로서 단순히 대속만 한다면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 그러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희생물이 헌물이 돼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야 한다.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사람이 번제헌물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번제헌물이 되어야 생명의 연합을 통해 유기적인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대속과 구속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법리적인 희생물과 유기적인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죄가 없더라도 사람은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로 창조되었지만 죄가 들어옴으로 피 흘림의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희생물 안에 헌물을 포함시키신 것이다.
번제단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우리는 통상 사람이 죄만 없으면 하나님을 만나 연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서 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죄가 있으나 없으나 사람은 육이다. 육은 불을 만나면 다 태워진다. 죽지 않을 육신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육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큰 이질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과 육은 있는 그대로 연합될 수 없다. 육이 영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삼켜짐으로 하나님께 연합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완전히 태워져 삼켜짐으로서 연합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통상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법리적인 대속의 혜택 정도로만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철저히 생명의 연합의 원리에 따라 유기적인 방법으로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짓는 분이시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시다. 즉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는 밭을 하나님께서 갈아엎고 하나님께서 씨를 뿌려 첫 열매를 거두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15:20)는 말은 사탄이 뿌려놓은 가라지 가득한 밭에서 하나님의 첫 알곡이 이것을 이기고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승리고 부활이다.
우리의 육신은 생명의 길이든 사망의 길이든 한번은 죽고 부활하게 되어있다. 씨를 땅에 뿌리면 어떤 씨도 똑 같은 과정을 거쳐 열매를 맺는 것이다. 나에게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면 생명의 부활로, 사탄의 씨가 뿌려지면 멸망의 부활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흙은 자체 씨가 없고 씨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뿌려짐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이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죽기까지 지키심으로 아담이 잃어버린 생명의 길을 회복하시고 인류를 다시 생명의 길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이 한번 죽는 것은 생명의 연합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지어 최종적으로 부활의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열매가 아니다. 열매는 부활한 영적인 몸이다. 우리 육신은 어차피 한번은 바꾸어져야할 몸이지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열매가 되어야 할 육신이 사탄의 열매가 되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 가운데 처음으로 하나님의 열매, 곧 생명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고전15:20) 첫 열매가 되셨다는 것은 새인류의 조상되셨다는 것이고, 새인류의 씨가 되셨다는 것이다. 생명의 길을 걸어가진 첫 번째 주자가 되신 것이다.(히6:20)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우리도 그분과 동일시되어 새인류의 첫 열매 종류가 된 것이다.(약1:18)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씨를 가진 자로 하나님의 열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명의 연합을 위해 사람의 육신을 원래 한번 죽도록 창조하였다고 해서 예수님의 대속의 죽음이 결코 희극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죽음 안에 있는 하나님에 경륜에 대한 오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