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잘못 알고 있는 것들

11. 죄와 상관없이 육체가 죽을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면

올더스조에 2015. 2. 28. 10:56

11. 죄와 상관없이 육체가 죽을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의미없게 된다. 만약에 아담이 죽도록 창조되었다면 그가 죄를 지었을 때 육체는 아무 영향이 없었고 다만 영혼만 죽은 것이라면 왜 예수님의 성육신이 필요한가?

 

 

생명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생명의 길이든 사망의 길이든 씨는 흙에 뿌려져 열매를 맺으려면 씨도 죽어야 하고 흙도 죽어야 한다. 죽음은 생명을 연결하는 접촉점이다. 또 성경이 말하는 죄란 각각의 피조물이 창조목적에 이탈한 것을 말한다. 모든 피조물의 죄는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것을 말한다. 아담의 죄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人格) 이탈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타락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3:9) 하시면서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사람의 위치는 흙-육신으로 생명이 없다. 만일 사람이 영생이 있었다고 하면 이것은 큰 오류이다. 하나님이 씨인데 사람도 씨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니까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육체는 아무 영향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흙-사람에게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하나님의 밭이 되어야 하는데 사탄의 씨가 들어와 사탄의 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밭은 갈아엎어져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밭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구속이다. 육체가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하는데 사탄의 씨가 들어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씨가 들어오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고 사탄의 씨가 들어오면 사탄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요일3:10) 이것을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탄의 밭이 되어 위치가 바뀌었다고 해서 흙-사람의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흙이기 때문에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흙-밭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비록 어제는 사탄이 그 밭의 주인이더라도 오늘 하나님께서 그 밭의 주인이 되시면 그 밭의 운명은 바뀌는 것이다. 밭에는 어떤 씨가 뿌려졌더라도 열매를 맺기 전에 갈아엎고 다른 씨를 뿌리면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타락한 사람의 상황이 이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 복이 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씨로 지음 받았다면 희망이 없다. 씨는 고장나면 버려야 되는 것이지 다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문에서와 같이 영혼이 죽는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정확히 말하면 영적인 죽음도 없다. 아담이 생명의 길로 가야하는데 사망의 길로 들어갔다는 것이다. 이것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법리적인 수준에서 단순히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혜택 정도로 생각한다. 물론 혜택도 있지만 새로운 생명의 전환을 위해 필수 과정이라는 것은 잘 모른다. 구속의 위치, 곧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무죄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영생이 아니다. 무죄했던 아담은 흙으로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지 거기서 그냥 끝나는 자리가 아니다. 어차피 아담은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되는 운명이었다.(2:21~23)

십자가는 분명히 고통의 자리고 부정적인 자리다. 그런데 거기에는 긍정적인 부분도 있다. 사탄에 대한 승리와 생명의 접촉점이라는 것이다. 옛 시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다.(고후5:17) 그래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고전 1:24) 하나님께서 최악의 부정적인 상황을 최상의 긍정적인 상황으로 바꾼 것이다. 레위기에 보면 희생물과 헌물이란 말이 나온다. 희생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고 헌물은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한 것이다. 만약 사람이 죄가 없었다면 헌물만 드렸다는 것이다. 성경은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인 것이다. 희생물은 불에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었다. 헌물도 죽음으로서 드려지는 것이다. 여기서 불은 하나님의 불을 의미하고 동시에 생명의 연합을 예표한다.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만 죽으셨다고 이해하면 낮은 수준이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도 불살라졌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부정적인과 것과 긍정적인 모든 것이 들어있는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서의 의미와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로서의 이중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10:5)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성육신 필요한가?

첫 번째,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람이 이 죄를 갚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피조물은 죄를 대신 갚을 수가 엎다. 자기가 지은 죄는 자신이 갚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창조했지 두 사람을 창조하지 않았다. 모든 물고기가 물고기이듯이 모든 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신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는 아담이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대속물이 되신 것이다.

 

두 번째, 아담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서 하나님이 쓰셔야 할 흙-사람의 위치(人格)를 사탄에게 빼앗겼다. 그래서 누군가 와서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인격을 되찾아 와야 한다. 이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사도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도 직접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승리자 자신이 씨-하나님의 밭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절대적으로 흙-사람이 필요다. 아담은 흙-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러므로 누군가 와서 흙-사람의 위치를 되찾아 와야 한다. 그래야만 씨-하나님께서 그에게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과의 전쟁은 바로 인생의 위치를 놓고 벌이는 전쟁이다. -하나님의 밭이 될 것인가? 아니면 씨-사탄의 밭이 될 것인가? 하는 전쟁이다. 아담은 속아서 사탄의 밭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흙-육신으로 오셔서 이 위치를 죽기까지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밭이 되셨고 하나님의 씨-생명을 받아 죽은 자들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열매-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세 번째, 새인류의 조상이 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의 구성원은 영이 아니고 육신을 가신 사람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사람으로 와서 하나님의 왕국의 조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아담은 실패했나? 씨가 잘 못됐기 때문이다. 아담이라는 밭에 사탄의 씨가 뿌려졌기 때문이다. -아담은 사탄의 씨와 연합되어 마귀의 자식이 되어 사탄의 왕국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사탄이 점령하고 있는 이 땅에 와서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인류-하나님의 왕국의 조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왕국의 씨-조상으로서 오신 것이다. 아담이 실패한 옛인류의 조상이라면 새인류의 조상은 사람이신 예수님이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대속물로서만 오신 것이 아니고 새인류의 조상으로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로는 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위치를 지킴으로 사탄에게 빼앗긴 인격을 되찾아 왔고 부활하심으로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심으로 새인류의 조상-씨가 되신 것이다.(고전15: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