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전한 자
‘그러나 노아는 주의 눈에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라.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더라.’(창6:8-9)
일반적으로 우리의 관념은 ‘완전한 자’라고 하면 완벽한 자, 위대한 자라는 생각이 먼저 든다. 그러면 성경은 왜 노아를 완전한 자라 하였을까? 결론부터 말하면 ‘완전한 자’의 의미는 ’완성된 자‘라 할 수 있고, 이 완성은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을 창조하시고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2:18)라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4) 하셨다. 여기서 남자는 하나님의 모형이고 여자는 사람의 모형이다. 사람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과 한 몸이 되어야 완성, 곧 완전한 자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은 빈그릇으로 창조되었고, 사람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연합하여) 완성되어야 하나님의 목적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과 연합하지 않고 타락하여 분리되었다.
왜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노아를 당대의 완전한 자라고 하셨을까? 이것은 그 당시의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창세기 6장에 의하면 당시 하나님의 아들들(천사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취하여 거인들이 출생하게 된다. 돌연변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피조물의 운명을 벗어나려는 시도이다. 일종의 해탈이다. 연약한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을 가진 천사와 결합하면 완벽한 자가 출생하게 된다.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피조물인 사람과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는 피조물인 천사가 결합하여 서로의 약점을 보완하여 하나님과 같이 된다면 얼마나 금상첨화겠는가? 이것이 타락한 사람과 타락한 천사의 기본적인 욕망이다.
성경은 타락한 천사들과 사람의 딸들이 결합하여 낳은 거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바로 그들이 옛적의 강력한 자들 곧 명성있는 자들이 되었더라”(창6:5)
강력한 자들, 명성있는 자들이 세상에서 말하는 완전한 자에 대한 관념이다. 그렇다면 성경이 말하는 완전한 자의 의미는 그 반대다. 세상의 관점에 볼 때 부족한 자가 완전한 자다.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자가 완전한 자다. 완전한 사람 속에는 하나님이 못들어 간다. 좀 모자란 데가 있어야 하나님이 들어가지 완벽한 사람이 있으면 하나님이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다 완전한 사람이 되려고 노력한다. 그런데 완전한 사람이 되면 하나님이 있을 자리가 없다. 조금 모자라는 데가 있어야 하나님이 들어오실 수 있다.
세상에서도 여자가 너무 똑똑하면 결혼을 못하는 경우가 있다. 여자는 사람의 모형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대하여 모두 여자다. 남편이 필요한 자다. 세상에서도 완벽하다는 사람은 예수님을 절대로 믿지 않는다. 자기가 완벽한데 왜 믿겠는가? 교회 안에서도 혼자 있으면 너무 고고하고 거룩하지만 한 명만 더 있으면 연합이 안되는 사람들이 있다.
세상의 완전과 하나님이 보시는 완전은 다르다.
‘그러나 노아는 주의 눈에 은혜를 입었더라. 노아의 세대들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라.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더라. (창6:8-9)
노아가 어떤 사람이었겠는가? 당대의 완전한 자라고 되어있다. 하나님이 보기에 완전한 사람과 인간이 생각하는 완전하다는 개념이 다르다는 것을 볼 수 있다. 하나님이 볼 때 노아는 완전했다고 한다. 그것을 우리 입장에서 생각하면 크게 오해된다. 노아는 완전하니까 은혜를 받았구나. 아니다. 의사가 누구에게 필요한가? 환자에게 필요하다. 건강한 사람에게 의사가 뭐가 필요하겠는가? 노아는 은혜를 입었더라. 하나님이 누구인가? 의사나 마찬가지다. 왜 노아를 보고 완전하다고 했는가? 말씀을 주기에 완전하다는 말이다.
누가 완전한 사람인가? 하나님의 말씀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다. 안 받아도 되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 아니라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다. 줄 수밖에 없는 분에게는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안 받을 사람은 천만명이 있어도 필요 없다. 나는 어차피 주어야 될 사람인데 아무도 받을 필요가 없다면 나는 쓸모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주실 분이고 인간은 받아야 될 사람인데, 누가 완전한 사람인가? 하나님이 주시는 것을 받을 수밖에 없는 사람이 완전한 사람이다. 노아는 완전한 사람이다. 사람이 생각하는 완전이라고 생각해보라. 그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완전은 네피림(거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생각하는 완전은 노아였다. 항상 ‘그러나’가 붙었다. 이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비밀이다.
‘그러나 노아는 주의 눈에 은혜를 입었더라’(창6:8)
노아가 당대의 거인처럼 자기 혼자 잘났다고 하면 하나님과 함께 걸을 필요가 있겠는가?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운데서 완전한 자더라. 그가 하나님과 함께 걸었더라.’ (창6:9)
이 말씀은 아브라함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아브람이 구십구 세였을 때에 주께서 아브람에게 나타나 이르시되, 나는 전능자 하나님이니라. 너는 내 앞에서 걸으며 완전할지니라’ (창17:1)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전적으로 내 은혜가 필요한 자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도 절대적으로 사람이 필요하신 분이다. ‘아담이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라는 말씀은 하나님 자신을 빗대어 하신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도 사람과 연합되어야만 완전하시다는 말씀이다. 그러면 세상의 관점대로 하나님이 불완전하신 분인가? 그렇지가 않다. 성경의 완전의 의미는 연합이다.
‘남자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4)
우리나라에서도 과거 결혼을 해야만 상투를 틀고 어른 대접을 받았다.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결혼을 하지않으면 상투를 못틀고 어른 대접을 받지 못했다. 남 녀가 결혼, 곧 연합해야만 완성, 곧 완전하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풍습도 상당히 성경적 개념에서 나온것이다. 성경은 하나님과 연합이 된자를 완전한 자로 보고 있다. 따라서 성경은 신약에 와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을 향하여 당연히 완전한 자라고 말하고 있다.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이르리니’(엡4:13)
‘그러므로 우리 완전한 자들은 다 이같이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서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너희에게 드러내시리라.’(빌3:15)
'우리가 그분을 선포하여 각 사람에게 경고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자로 드리고자 함이니라.' (골1:28)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죄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 우리(교회)는 죄가 없다. 완전하다. 흠이 없다.
‘...그분께서는 야곱의 불법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 안에서 잘 못을 보지 아니하였도다...’(민23:20)
'이것은 그분께서 말씀을 통해 물로 씻음으로 교회를 거룩히 구별하고 정결하게 하려 하심이요 또 그것을 점이나 주름'이나 그런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를 위해 제시하려 하심이며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6-27)
우리가 볼때 교회는 불완전하고 흠이 많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교회는 흠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인데 어찌 그리스도가 흠이 있겠는가? 나를 보지 말고 주님을 보자.
우리는 주님 안에서 완전한 자다. 하나님의 은혜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