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악의 지식세계 대 생명의 세계
18. 선악의 지식의 세계 Vs 생명의 세계
우주 안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선악의 지식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다. 하나님과 종의 관계에 있는 천사들은 선악의 지식의 세계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는 사람은 생명의 세계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세계를 목표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악의 지식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아들이 될 자가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선악의 지식의 세계란 선악이라는 도덕과 지식이라는 능력이 가치기준이 되는 현 세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세계와 같다. 아담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위치를 이탈했을 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은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12장 4절에 보면 마지막 때에 ‘지식이 증가하리라’라는 말씀이 있다. 결국 지식이 증가한다는 말은 결국 선악의 지식의 세계가 열매를 맺어 큰 바빌론으로 간다는 말이다.(계17, 18장)
그러나 사람은 원래 선악의 지식의 세계가 아닌 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선악의 지식의 세계는 사람에게는 죄와 사망의 세계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용하는 세계로 원위치 한 것이다.(롬8:2) 이 두 세계에 대한 관념이 명확하지 않으면 혼란이 온다.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세계임에도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 바라보기 때문이다.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의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중력의 세계를 중력의 세계로 바라보는 거와 같은 것이다.
근원과 현상
생명이란 근원적인 것이고 현상이란 근원에 대한 결과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도 하나님은 근원으로 실재고 사람은 단지 형상이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은 영이 생명이고 실재다.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니고 단지 형상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목표는 형상에 있지 않고 실재에 있다. 영은 생명이고 인격적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표는 물질에 있지 않고 영, 곧 인격에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있는 것이다. 사람은 물질적인 존재라서 천국하면 계시록 21장과 22장에 나와 있는 보석들로 이루어진 어떤 환경을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그런 유치한 곳에 있지 않다. 그런 환경은 선악의 지식의 세계의 관점에 있는 사람의 필요지 하나님께서 무슨 그런 환경이 필요하시겠는가? 하나님은 그런 환경이 필요한 곳이 아니라 실재 곧 인격이 필요하신 것이다. 아내가 되어 같이 살 수 있는 인격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새예루살렘을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하늘에서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더라’(계21:2)라고 하는 것이다. 곧 새예루살렘이란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인격적인 세계의 최종완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구약은 영-실재에 대한 그림자로 구약의 복은 물질적인 것이었지만 신약의 복은 영적인 복이다.(엡1:3)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에게 복을 주셨으니(엡1:3)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 곧 인격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실재를 보려고 해야 한다. 율법은 왜 실패했는가? 율법 안에 내재 되어 있는 실재, 곧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성경기록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하나님 마음을 기록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문자적인 현상에만 치중한다면 이것은 도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다. 근원을 모르고 현상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현상만을 가지고 말한다면 어느 종교나 비슷하다. 어쩌면 불교의 진단과 대책이 더 심오할 수 있고 더 매력적일 수 있다.
그러면 현재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생명의 세계를 선악의 지식세계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세계와 생명의 세계가 혼재되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모르니 설교를 하더라도 어떤 구절을 들어 우리들의 생활에만 적용하는 생활설교만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표가 있고 사람이 하나님의 목표에 동역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표를 모르니 자신들의 목표만 말하고 있는 가련한 수준이다.
성경은 법리적인 관점이 아닌 영-인격적인 관점에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생명의 본질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보면 안된다. 성경은 영생은 내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한다.(요17:3) 성경은 한 목표를 위해 기록되어 있다. 한 생명,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목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요5:39) 그럼에도 우리가 아는 예수는 얼마나 빈약한 수준인가? 우리가 아는 예수님의 수준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부활하셨으니 믿어야 한다는 수준이다. 이것은 생명-인격을 아는 것이 아니고 지식의 관점에 아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표면적인 것만 아는 것이다. 지식의 세계는 한계가 있으나 인격의 세계는 한계가 없다. 이것은 그분의 인격을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생명나무 열매라면 우리는 껍질만 먹고 있는 것이다. 우주보다 크신 그분의 인격을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르니 그분이 보실 때 얼마나 안타까우시겠는가?
우리는 왕가의 제사장들이다. 신분이 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총사령관이시라면 우리는 지역 사령관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한 자들로서 그 수준에 맞는 사고와 행동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어떻게 하면 달성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분에 합당하게 우리의 수준은 우주적이고 전략인 수준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수준을 우주적인 크기의 수준에서 알기를 원하신다.(엡3:18)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으로 모르고 내 목적을 위한 생활설교에 치중하다보니 이것은 사령관의 수준이 아니라 분대장 수준에서 성경을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아! 얼마나 가련한 수준인가? 이 또한 근원 곧 하나님의 마음과 목적을 모르고 현상에만 치중하는 결과이다. 이것은 생명이 없는 지식으로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서의 지식이 증가한다는 말도 결국 세상은 점점 갈수록 지식은 증가하나 영-인격의 세계는 피폐해 진다는 것이다. 두 세계가 공존하여 발전할 수 는 없다. 한쪽이 증가하면 한 쪽은 감소하는 것이다.
본성에 속한 사람, 육신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서 3장 3절까지 말씀을 살펴보자.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라.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며 지금도 못하기 때문이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였느냐?(고전2:12~3:3)
본성에 속한 사람, 육적인 사람, 영에 속한 사람,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이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 나와 있다. 세상은 크게 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들때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과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되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이인 육적인 사람과 그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영에 속한 사람이다.
본성에 속한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든 다음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살아있는 혼이 된 사람과 같이 혼적인 사람이다. 혼적인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지식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어리석게 보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드러나셨다(롬1:4)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원래부터 하나님 아들이었다는 것은 혹시 모르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 아들로 밝히 드러나 확정되셨다, 인정되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교황이나 황제, 유명한 성자를 보고 그렇게 말한다면 이해가 될 수 있는 일이지만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아들이 되느냐는 것이다.
혼적인 사람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정신적인 인간이다. 그 안에는 지식과 지혜를 갖추기 위한 지성이라는 것과 희노애락(喜怒哀樂)이라는 것을 느끼는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 또 결정하고 실행하는 의지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이것을 지정의(知情意)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혼-정신 구조이다. 물고기는 밖의 세계를 모른다. 알 수 있는 기능이 없는 것이다. 그가 물 밖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죽음의 순간뿐이다. 이와 같이 혼적인 인간은 다른 세계에 있기 때문에 영적인 일을 알 수 없다.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라고 했다.(고전3:1) 아이들은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성숙하지 않기 때문에 넓고 깊은 것들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냥 근시안적이고 가까운데 밖에는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충성이 있다. 그런데 어린아이와 같이 소아적이고 표면적이기 때문에 영적인 것을 알지 못해서 교조적이고 교리적이고 표면적이고 문자적이고 기계적이다. 그래서 성경 한 구절을 가르쳐주면 그것을 문자대로 그대로 믿어버린다. 잘 믿는 것 같은데 깊이를 모른다. 믿기는 잘 믿는데 속-영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에 관한 것이고, 가장 깊은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표면만 알면 안된다.
성경은 표면과 이면이 있다. 표면은 영원하지 않고 이면은 영원하다. 예를 들어 ‘돼지 고기를 먹지 말라’는 말의 이면은 이방인과 함께 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돼지 고기를 먹지 말라는 표면적인 말은 유효하지 않지만 이방인과 함께 하지 말라는 이면은 영원하다. 또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의미는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의미다. 아담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어긴 자는 죽이라고 한 것이다. 안식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표면이고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것은 이면이다. 안식일을 키라고 한 표면은 현대에 와서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이면은 오늘 날에도 영원한 것이다. ‘안식일 날 일하지 말아라’ 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있는 말씀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만 알고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일하시니까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니까 ‘예수는 안식일을 범한 자다’ 고 해서 죽인 것이다.
또 계시록에 14장에 가면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정확히 사람의 수를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정통이든 이단이든 서로 해석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숫자는 항상 어떤 것을 상징한다. 삼은 하나님의 수, 사는 피조물의 수다. 삼 더하기 사는 칠로서 옛 창조의 수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더하기에 있지 않고 연합에 있다. 더한 것은 불완전하지만 곱한 것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며 갈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열두 지파, 신약에 와서는 열두 사도가 나오고 하나님의 최종완성인 새예루살렘은 열두 문, 열두 기초석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열둘은 하나님의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숫자다. 열둘 곱하기 열둘은 백사십사이고 백사십사에 만을 곱하면 십사만 사천이다. 성경에서 열은 더 이상의 수가 없다 라는 의미로 만수다. 열에 열을 곱하면 백, 백에 백을 곱하면 만이다. 더 이상의 수가 없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십사만 사천은 우리가 셀 수 없는 많은 사람의 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것을 문자적으로 십사만 사천이라고 해석하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지금 대부분 소위 근본주의 진영에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인격적 인간이 아니라 기계적 인간이 되고 있다. 말로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도로 율법주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도 단순히 육체적 죽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죽음에 한정시켜 버린다.
그러니까 문자적인 사람들은 참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맞다고 할 수도 없고 맞기는 맞는데 속을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답답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들은 말마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 중심!’이라고 한다. 성경을 열심히 읽지만 표면만 읽기 때문에 문자주의적이고 열심히 봉사하고 있지만 육적이기 때문에 편당을 만들고 분란을 일으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에 관한 것이고, 가장 깊은 본질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을 표면적으로 알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라는 물질적인 나라가 아닌 예수라는 인격의 연합체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예수라는 인격에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동산-성막-성전-예수-교회-천년왕국-새예루살렘으로 발전된다. 성막, 성전은 예수라는 인격을 건축물로 묘사한 것이다. 지금의 교회를 건축물의 형태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 동산, 천년왕국, 새예루살렘도 예수라는 인격을 동산으로, 천년왕국으로, 새예루살렘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영에 있지 물질에 있지 않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하나님의 거처는 물질이 아니고 인격 안에 거하신다. 어떤 사람 안에 거하는가? 예수라는 인격 안에 거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니 천국이 무슨 순금 덩어리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곳이라고 생각하고 예수의 인격과는 거리가 먼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인 존재다 보니 그러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영이신 하나님은 그런 물질들이 필요하지도 않으며 중요하지도 않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은 예수라는 인격에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하늘이 아니라 지금 땅위의 교회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기록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하였다.(요5:39) 그러니까 구약에 기록된 모든 긍정적인 것은 예수라는 인격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나무, 어린양, 만나, 반석, 제물, 성막, 성전, 제사장 등은 모두 예수님의 인격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또 문자주의적이고 표면적인 사람들은 교리를 진리라고 생각하고 교리를 지키는 것이 진리를 따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목표는 영-인격적인 것에 있는데 말씀을 기계적으로 받아드리기 때문에 기계적 인간이 됨으로서 분쟁을 일으키면서 정의를 수호 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아니면 교회가 잘 못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 영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니까 무슨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난 사람이다. 땅에 있지만 시민권이 하늘에 있는 사람들이고 혼과 육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헷갈리게 된다. 죽고 다시 나지 않으면 무엇을 해도 어떻게 해도 모두 육이고 혼이다.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육신이 생명에 삼켜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되는 것이다.(고후5:4)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먹힘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음식이 됨으로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음식-제물이 되려면 나는 그리스도의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인격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성령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영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새로운 영이다. 인간은 창조될 때 이미 영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영은 사람의 영이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창조된 영이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물고기는 물 밖의 일을 알 수 있는 기능이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없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모르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고전2:16)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
기록된 말씀을 문자적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마음을 아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 곧 마음이 생명이다.(잠4:23) 하나님의 목표는 물질에 있지 않고 영-인격에 있다. 그럼에도 이 목표를 모르니 천국이 무슨 기화묘초 만발한 곳이라든지, 또는 보석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와 아무 상관도 없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이다. 거듭난 사람만이 영에 속한 세계를 볼 수 있다. 영적인 사람은 신과 같은 성분이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거와는 상관이 없고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산 사람으로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해 준 생명 안에 그리스도의 숨을 받은 것이다. 숨은 영이요 생명이다. 숨이 떨어지면 죽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8:9). 아담은 하나님께 받은 숨으로 살아 있는 혼이 되었고,(창2:7) 우리는 예수님께 받은 숨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요21:22)
법리적 율법의 세계 vs 유기적 생명의 세계
구약은 법리적 율법의 세계라 할 수 있고 신약은 유기적 생명-인격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는지 잘 모른다. 그냥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독단적인 섭리로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의 법칙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예언도 점쟁이가 뭘 맞추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필연이다. 씨를 뿌리면 봄에 싹이 나고 여름이 되면 잎이 무성해질 것이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을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점쟁이라서 아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필연을 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아담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율법이 주어진 것이다. 아들이 될 자가 종의 위치로 이탈했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법이 주어진 것이다. 처음에 이스라엘 민족은 이법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자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행하리이다.’(출24:3) 하면서 자신있게 하나님께 다짐하였다. 그러나 이법은 원래 사람을 위한 법이 아니었다. 갈라디아서 4장 21절에서 23절에 따르면 율법은 종들에게 주어진 법이다. 아들은 종을 다스려야 할 자다. 율법은 생명의 법의 통제를 받아야 할 법이지 율법이 생명의 법을 통제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율법은 아들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법리적 세계를 끝내시기 위해 마지막 아담-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희생물로서 법리적 심판을 받으시고 죽으셨다. 그런데 그분께 단순히 법리적 심판만을 받았다면 부활이 없는 것이다. 유기적 헌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지신 것이다. 번제헌물이 되셨기에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다. 법리적 선악의 지식세계를 종결하고 유기적 생명의 세계를 여신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근본주의 진영은 헬라적 합리주의, 지식주의 영향으로 인해 근원을 알지 못하고 현상만을 말한다. 법리적인면 강조하다 보니 우주보다 크신 그분의 생명의 인격의 세계를 간과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 또한 표면만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약은 법리적인 세계로서 현상이라면 신약은 생명의 근원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지식세계에 있기 때문에 선이 악을 이겨 선이 지배하는 세계가 하나님의 나라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선이라는 것도 나는 좋지만 하나님은 안좋으실 수 가 있다. 하나님의 목표는 선악의 지식세계가 아니라 생명의 세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경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세계를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선악의 지식세계 있다보니 생명의 세계에 대한 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하체를 들어낸 사건이 있었다. 이것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악의 관점에 노아가 술을 먹음으로 하체를 드러냈으니 술을 먹으면 안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하체를 드러낸 사건은 이외에도 몇 군데 더 나온다. 창세기 2장 25절에 보면 ‘그 남자와 그의 아내가 둘 다 벌거벗었으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 라는 말이 나온다. 선악의 지식세계에서는 벌거벗은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나 부부간에는 생명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 보면 술에 취에 하체를 드러낸 노아는 마땅히 비난받아야하고 그 하체를 본 노아의 아들 함에 대한 형벌이 지나치다고 생각된다. 단지 함이 아버지의 하체를 본 것이 저주를 받을 만한 일이냐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노아가 잘 못했다는 말이 없고 아버지의 하체를 본 함에 대한 저주만 있다. 이것도 생명의 관점에 보아야 해석이 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부활의 세계, 곧 생명의 세계에 있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생명을 예표한다. 노아가 포도주 취해 누워있다는 것은 노아는 홍수-죽음을 통과해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부활생명의 세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노아의 아들 함은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아버지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종이 생명과를 먹은 아들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생명의 세계를 업신 여기는 것이고 하나님을 업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함은 저주를 받은 것이다. 결국 창세기 9장에서 함이 종이 된 것은 선악과를 먹은 결과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종이 되고 생명과를 먹으면 아들이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 그 열매가 함이라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이스마엘은 노예 여자에게서 육체를 따라 태어났으며 이삭은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약속-영을 따라 태어 난 자라고 말하고 있다.(갈4:23) 이삭은 죽고 다시 태어난 부활생명을 가진 자를 예표하고 이스마엘은 육신을 따라 태어난 자를 예표한다.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마엘이 혈통적으로 적자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지 영-생명이 아니다.(요3:6) 그래서 사람은 흙-육신에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 다시 태어나야 한다.(요3:5) 이스마엘은 선악과를 먹고 종으로 태어난 자고 이삭은 생명과를 먹고 아들로 태어난 자라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는 말이 나온다.(창21:9) 즉 종이 아들을 희롱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부활생명을 업신 여긴 것이고 하나님을 업신 여긴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지만 이 일로 인해 이스마엘과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에서 쫒겨난다.
또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법궤가 돌아올 때 기뻐서 아마 에봇을 입고 춤을 추었다. 춤을 추니까 몸이 다 보였는지 사울의 딸이었던 다윗의 아내 미갈이 그것을 보고 왕을 업신여겼다고 했다. 다윗이 돌아오자 ‘오늘 이스라엘 왕이 어찌나 영화로우시던지 오늘 자기 신하들의 계집종 들 눈에 마치 하잘 것 없는 자들 가운데 하나가 염치없이 몸을 드러낸 것처럼 드러내셨도다.’(삼하6:20) 하면서 조롱했다. 다윗은 ‘나는 주 앞에서 한 것이라.’(삼하6:21) 고 대답했다. 성경은 왕이 체통을 지키지 않고 몸이 드러날 정도로 춤을 춘 것이 전혀 문제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하6:23) 미갈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생명의 세계를 조롱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갈은 저주를 받고 자식-생명을 생산하지 못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 다섯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잘 못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모르면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생명의 세계를 조롱할 수가 있다. 또한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수많은 이방민족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 이것도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생명의 세계를 예표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선악의 지식세계에 있지 않고 가나안 땅-생명의 세계에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흙-육신이 하나님의 씨를 받아 거듭나는 것이다.(요3:5) 행위에 있지 않고 생명에 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은 ‘남자가 우리 가운데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창3:22) 하였다. 선악과를 먹으면 우리가 하나님같이 되어 하나님도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 안에서 보면 생명 안에 있는 것이 업신여겨 보이고 판단이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지식의 세계에서 보면 성경은 완전하다. 그래서 어쩌면 디지털처럼 완전하게 꼭 들어 맞을 수 도 있다. 그러나 영-인격의 세계는 수학이 아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도 표면만 본다면 그것은 법리적인 세계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표면이 아닌 이면에 있는 영-마음에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데 과연 그분의 인격을 아는 것이냐는 것이다. 겨우 안다는 복음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으시고 살아나셨다. 이것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법리적이고 교리적으로 아는 것이다. 생명나무 열매의 알맹이를 먹어야 하는데 껍데기만 먹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구약적 경륜 안에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경륜의 핵심은 성육신이다. 예레미아 31장 33절에서 34절에서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 마음 속에 그것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다시는 그들이 각각 자기 이웃과 자기 형제를 가르쳐 말하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그들의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다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31:33-34)
구약경륜은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을 통해서 대리로 말씀하신 것이고 신약경륜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하늘에 있거나 대리자에게 있지 않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말씀이 사람과 분리되지 않고 말씀과 육신이 한 덩어리가 된 것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법이 돌비에 새겨진 것이라면 신약은 심비에 새겨진 것이다. 이것인 신약경륜의 핵심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이것을 잃어버렸다. 예수님 한분에게만 한정시키기 때문에 사실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육신은 죄 때문에 안되고 또 죄로 인해 죽어야 하고 죽은 후에나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성경은 거짓말이 된다.
우리의 죄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물 되심으로 다 해결되었다. 그럼에도 우리 육신이 죄 때문에 죽는다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해결이 안된 것이다.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전 인격적으로 구원받은 것이다. 사도들을 보면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과 한 덩어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쓴 편지가 성경이 된 것이다. 구약의 대언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였기 때문에 항상 서두에 ‘주가 말하노라’라는 말씀을 앞에 붙였지만 신약은 사도들 자신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쓴 편지가 하나님 말씀이 되었던 것이다. 사람의 말이 하나님 말씀이 된 것이다. 그들 속에 하나님의 법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설교자들이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자신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제하여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만 전하게 해달고 기도를 하곤 한다. 일견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비쳐지기도 하지만 이것은 구약 경륜 안에서 기도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아무 책임도 없는 사람이 된다. 구약에서 대언자는 단순히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였다. 그러나 신약은 말씀과 육신이 한 덩어리가 된 성육신의 개념이다. 결국 신약 경륜 안에서는 자기 자신이 말씀이 육신이 된 만큼 하나님 말씀을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먹고 내 생명이 된 만큼 말씀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가 육신의 죄 때문에 죽는다면 내 육신 안에 죄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될 수 있는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죄가 있는 곳에는 있을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우리 육신의 죽음 문제도 그렇다.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그것은 심판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었는가?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 육신의 죽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의 관점에 보면 육신의 죽음은 영생을 위해서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육신-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져야 하기 때문이다.(고후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