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전쟁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올더스조에 2015. 1. 24. 15:05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사람은 왜 흙-육신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은 씨고 사람은 흙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사처럼 씨-영으로 만들어서 죽지 않게 만들지 흙-육신으로 만들어서 죽게 만들었는가? 하는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을 창조하고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분배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신격은 인격의 내용이 되는 것이고 인격은 신격의 표현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다. 이것이 예수님에게 와서 성취되었다. 골로새서 2장 9절에서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신격의 모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고’ 라는 말씀이 이 말이다.
그런데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창조물은 모두 1차적 창조로 끝나지만 사람만은 2차적 창조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다. 씨-하나님께서 자신의 씨를 뿌리려면 그 재료는 반드시 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씨로 창조되지 않았고 흙으로 창조되었다.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흙-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여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창조물들은 영원한 생명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 1차적 창조로 완성이 된다. 천사도 죽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은 아니기에 1차적 창조로 완성이 되고 거듭남이 없다. 또 영-씨로 창조되었기에 타락하더라도 거듭남이 없다. 씨는 잘 못되면 버려야 되는 것이지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사는 비록 영원한 생명은 아니지만 죽지 않기에 타락하더라도 사형선고를 안 내린다. 사람에게는 왜 사형선고를 내리는가? 육신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천사에게는 사형선고를 안 내린다. 타락한 마귀와 그의 천사들이 가는 곳은 지옥이고 최종적으로 불호수다.

죽지 않는 영적 피조물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의 육신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사람이 영생을 가졌다면 어떻게 사형선고를 내리는가? 영원한 생명이 어떻게 죽는가?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다. 영원한 생명은 말 그대로 영원한 것이지 영원한 생명이 어떻게 가다가 단절되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보장이란 말도 의미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논리가 부족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논리를 가지고 나온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비생명적인 것은 창조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처음부터 영생을 가진 존재로 만들지 않았는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흙이 필요한 것이다. 즉 씨는 절대적으로 흙이 필요한 것이다. 씨를 공중에 뿌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은 흙-육신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 이전에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람이 죄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주는 계시는 죄 이전에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 흙-육신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말한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고전15:50)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사람이 육신으로 만들어 진 것은 죄와 관계없다. 본질적으로 사람은 흙-육신이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는 것이다. 육이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고 영이 하나님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육이 열매가 아니고 영이 열매다. 그래서 죄가 들어오기 전의 창세기 2장 21절이 주는 계시도 분명히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 데려오시니”

여기서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아담이 아니고 이브다. 아담의 거듭남을 통해 산출된 부활생명, 곧 이브-교회가 하나님의 최종 목표다. 사람이 거듭나야 되는 것은 죄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흙-육신이기 때문에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이 진리를 확증하신다.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요3:3)하셨다. 이것을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죄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어서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요3:5~6) 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태어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1차적으로 물-육신으로 태어난 다음 2차적으로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라고 정의해 주고 계시는 것이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요3:6) 라는 의미는 육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육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생명이 아니다. 육에서 난 것이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고 영에서 난 것이 하나님의 최종목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죄인이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이 없다. 우리가 육신으로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육신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육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죽고 다시 산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한번은 죽고 다시 태어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인생의 본질적인 목적을 언급하신 다음 요한복음 3장에서 14절에 와서 사람의 죄 문제를 언급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요3:14)

그러니까 사람은 본질적으로 흙-육신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거듭나야하는데 먼저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죄로 인해 심판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육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창세기 2장까지는 무죄한 육신이었고, 타락한 창세기 3장 이후로는 죄 된 육신이 된 것이다. 무죄한 육신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즉 씨-하나님이 흙-사람에게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라는 것이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육은 육이지 영이 아니다. 그래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고 죄가 들어옴으로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헌물과 희생물의 공통점은 죽음이다. 희생물은 법리적인 것이고 헌물은 유기적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법리적인 희생물 안에 유기적인 헌물을 포함시켜 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고전1:24) 라는 말이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한 번은 죽을 밖에 없는 흙-육신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훼손되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경륜의 목적이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람의 탁월성이 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영생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1차적 창조로 끝났지만 사람만은 1차적 창조에서 2차적인 생명의 전환-거듭남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아담은 흙으로 창조된 살아 있는 혼이지 생명이 아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전15:45~46)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아담은 흙-육체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인 몸-생명이라는 것이다. 육체는 흙으로서 씨가 없고 영은 씨-생명이다. 아담은 살아 있는 혼, 육체에서 영적인 몸으로 변화해야할 존재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아담은 영-생명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은 생명이 없는 존재고 마지막 아담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너무도 분명하게 나와 있다. 하나님의 씨가 본성에 속한 흙-사람에게 먼저 뿌려져 그 뒤에 영에 속한 사람으로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 말씀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 사람 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이다. 첫 사람아담과 마지막 아담이다. 우리는 첫 사람 아담-살아 있는 혼으로 창조되어 마지막 아담–영적인 몸으로 거듭나야 될 운명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이어서 고린도 전서 15장 48절, 4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땅에 속한 자들은 또한 땅에 속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과 같으니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니라.(고전15:48~49)

이 말씀도 분명히 아담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별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땅에 속한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은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땅에 속한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땅에 속한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되는 것이다. 씨-하나님께서 땅-사람에게 씨를 뿌려 사람에게서 부활의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이 경륜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첫 사람 아담에게서 처음부터 씨-생명이 없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 했다. 이 말은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이 실재라면 생명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모형이란 생명이 아니고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는 의미다. 아담이 죄를 져서 모형이 된 것이 아니고 처음부터 모형이라는 것이다. 모델하우스는 실제적인 집이 완성되면 없어지는 것이다. 모델하우스는 실재를 위해 잠시 지어진 것이다.

만일 영원한 생명이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의 구원도 만들 수 있는 것이고 언제든지 행위에 의해 훼손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낳음 받은 자다. 만들어진 것은 사탄이 훼손할 수 있지만 낳음 받은 영원한 생명은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훼손할 수 없기에 우리의 구원이 영원한 것이다.(롬8:38~39) 여기서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원래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는데 아담이 죄를 져서 죽게 되었다면 현재 우리의 구원도 언제든지 훼손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1차적 창조로 완성되지만 사람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단지 죄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창2:21~23) 아담은 창조 시에 원래 죄가 없었다. 그렇다고 영생이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존재였다.(창3:22)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무죄를 영생으로 생각하는데 무죄는 단지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일 뿐이다. 죄인을 다시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의 위치로의 회복, 이것을 구속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5)

우리가 흔히 ‘구속’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구속은 죄들의 용서를 받은 사람의 위치로서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구속이 거듭남이 아니다. 죄란 쉽게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이 씨를 뿌려야 할 밭인데 거기에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구속이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시기 위해 사탄의 밭을 갈아엎으신 것이다. 사람을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이 거듭남이 아니다. 거듭남은 생명의 문제다. 사탄이 씨를 뿌려놓은 밭을 갈아엎은 다음 그 밭에 하나님께서 씨를 뿌려야 거듭남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구속이고, 부활이 거듭남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예수님을 믿고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용서 받았다고 해서 구원-거듭남이 아니다. 무죄는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지 거듭남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은 창조된 사람-흙에게 자신의 생명-씨를 심어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이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들어오기 전의 창세기 1, 2장의 원 계시에 의하면 처음에 사람은 생명이 없었기 때문에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창2:21~23) 그런데 사탄이 이 경륜을 방해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경륜이 방해를 받는가?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의 지혜를 어찌 피조물이 따라 올 수 있는가?

하나님은 농부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농사다.(고전3:9) 하나님은 무엇을 하시는 분인가? 사람 농사를 짓는 분이시다. 흙-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뿌려 인격의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열매의 완성은 육체가 아니고 영적인 몸-부활생명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농부는 밭에 씨를 뿌려 흙을 거두는 것이 아니고 열매를 거둔다. 하나님도 똑 같다. 씨-하나님도 흙-사람에게 씨를 뿌려 육체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씨-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한 영적인 몸이 하나님께는 열매가 되는 것이다. 열매와 씨, 영은 하나로 생명이다. 육체가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영적인 몸-부활의 열매가 생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영이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씨가 사람-흙에게 뿌려졌을 때 사람-흙은 영적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의 육체는 죽음을 통해 땅에 뿌려지면 장차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 부활생명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 3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 또 네가 뿌리는 것으로 말하건데 네가 앞으로 있을 그 몸을 뿌리지 아니하고 밀이든 곡식이든 다만 알갱이를 뿌리되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그것에게 고유의 몸을 주시며 또 모든 씨에게 그것의 고유의 몸을 주시느니라.(고전 15:36~38)

여기서 보면 사람이 죽는 것을 씨 뿌리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우리는 처음에 흙으로 지음 받아서 우리 안에는 씨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씨든 사탄의 씨든 둘 중에 하나는 무조건 사람 안에 들어와 있다. 그래서 그 씨가 열매를 맺으려면 땅에 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육체적 죽음이다. 육체-흙이란 씨가 들어와 발아할 때까지 그 씨가 발아 할 수 있도록 유지시켜 주는 토대이지 자체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서 자기 스스로 아들-생명을 낳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씨를 뿌리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사탄의 씨가 들어 있는 사람은 사탄의 아들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이 죄를 범한 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이 영생하게 되었는데 저주로 인해 흙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본질이 흙임에도 불구하고 신(영)-씨가 되려고 한 아담에게 사람은 결코 신-씨가 될 수 없고 결국 흙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사탄에게 속아 흙으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선악과를 먹었지만 결국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죽는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으면 거듭남이 없는 것이다. 거듭남, 부활은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정해진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 말씀은 아담에 대한 저주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저주마저도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아니고 아담이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이탈해서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산물이었다. 주 내용은 죄를 범한 인간을 다시 회복시켜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돌이키시겠다는 하나님의 대책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도 죽음과 부활을 통해 아들로 완성이 되고 실제적인 하나님의 아들로서 열매가 되는 것이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롬1:3~4)

여기서 보면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드러나셨다고 한다. 그러면 예수님은 부활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가? 이 말씀은 예수님이 부활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농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육적인 몸이 최종완성이 아니라 영적인 몸이 열매로서 최종완성이라는 말이다. 사람 농사를 지으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의 육적인 몸이 열매가 아니라 부활한 영적인 몸이 열매다. 육적인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전환은 다른 생명으로의 거듭남이다. 거듭남이란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 창조될 때 육체로 창조되었지 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육체로 창조되었지 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와 관계없이 거듭나야 했다.

육체는 열매가 아니고 단지 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밭인 사람에게 사탄이 자기 씨를 뿌렸지만 하나님은 그 밭을 갈아엎고 다시 씨를 뿌리면 되는 것이다. 갈아엎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이렇게 사탄이 방해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경륜의 원칙은 더 강화되는 것이다. 흙은 그대로 있는 것보다 많은 과정을 겪어야 더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사탄의 방해로 흙-사람은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그 시련이 많을수록 더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했지만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사탄이 방해하면 할수록 더 좋은 강화된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가 더 넘치게 된 것이다. 아담이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셔야 했지만 이제 죄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의 경륜을 바꾸지 않으니 얼마나 더 은혜가 넘치겠는가? 그래서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이다.(롬5:20) 사탄이 방해했지만 하나님께서 더 강화된 생명을 주신 것이다.

온 우주 안에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피조된 생명이지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은 무엇인가?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만들어진 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주어서 사람에게서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무엇을 계시하는가? 로마서 1장 20절을 살펴보자.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롬1:20)

이 말씀은 단순히 만물을 보고 ‘창조주 하나님은 계시는 구나’라는 것을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이것은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만물은 생명으로 구성되어 있고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생명에 있다. 생명이 아닌 것은 다 거짓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만물을 통해 생명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만물은 하나님 자신-생명을 계시하고 있다. 특수계시만이 성경이 아니고 일반계시도 성경이다. 하나님의 모든 관심의 초점은 생명이다.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라는 것을 만물 통해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에는 만들어졌지만 다시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이 성경의 일관된 진리다. 죄가 있기 때문에도 거듭나야 하지만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크게 외적인면과 내적인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외적인면은 그분이 하신 일과 일하시는 원리를 아는 것이고 내적인 것은 개인적으로 그분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란 생명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생명의 원리는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명의 원리를 모르고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 영생이 있었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말이 안 되면 무조건 하나님의 전능성을 말하면서 하나님은 뭐든지 다할 수 있다고 말한다. 또 그것을 믿는 것을 대단히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다 창조할 수 있어도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식으로 생명이 아닌 모든 것은 다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은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현대에 와서도 모기 한 마리도 지식을 통해 만들 수 없다. 너무도 간단한 진리를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고 한다. 아담 이래 너무 오랫동안 지식의 세계에 빠져 있는 결과이다. 사람은 원래 생명의 세계에 있어야 하는데 사탄으로 인해 지식의 세계에 와 있는 것이다. 사탄은 속이는 자로서 지식으로 생명을 모조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을 거짓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지식으로 생명을 대체하고 생명을 지식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세상과 종교다. 선악의 지식나무 열매를 먹은 세상과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하나님 나라의 차이는 무엇인가? 지식 대 생명의 차이다. 세상은 지식으로 세워진 세계라면 교회는 생명으로 세워진 세계다. 지식은 분열을 가져오고 생명은 한 덩어리로서 연합된다. 그러므로 세상은 지식의 세계로서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끝없이 분열한다. 사탄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지식으로 생명의 세계를 모조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이 이렇게 흘러가고 있다. 소위 말하는 유전공학, 생명공학이 다 이런 거다. 사탄은 속이는 자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지식으로 생명의 연합을 모조하고, 장차에는 사람의 몸속에 어떤 장치를 넣어 생명의 연합을 모조할 것이다.(계13:16~19)

다시 한 번 말하면 생명은 지식을 통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행위가 끼어들 틈이 없고 은혜라는 것이다. 지식은 행위로서 실재-생명이 아니고 형상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처음부터 사람을 영생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창세기 2장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또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인데 어떻게 피조물인 사탄이 영원한 생명을 훼손할 수 있는가? 한번 영원하면 끝까지 영원하지 어떻게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중간에 끊어지는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한 것은 사람은 처음부터 영생이 없었고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죽는다고 하는 것이다. 천사는 비록 영원한 생명은 아니지만 죽지 않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안 내린다. 죽을 수 있는 존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죽지 않는 존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하신 생명을 사람에게 주었는데 사탄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명을 잃었다면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훼손하는 것이다. 사람은 단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래서 사탄이 훼손할 수 있는 것이다. 만들어진 것은 훼손할 수 있지만 낳음 받음 것은 생명이기 때문에 훼손할 수 없다.

또 사람이 원래 영원한 생명을 가졌는데 하나님께서 ‘죽으리라’ 했기 때문에 죽었다면 지금 소위 우리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도 늘 불안한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고 유한한 생명이다.

사람은 살아 있는 혼으로 창조되었다. 살아 있는 혼은 피조된 사람의 생명이지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사람의 만들어진 재료는 흙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혼이란 흙과 같다. 타락했기 때문에 흙이 아니고 본질이 흙이다. 흙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그런데 씨와 땅은 절대적으로 상호 필요한 관계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다. 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여 아들을 생산할 여자의 운명이지 자체로 씨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자체 씨가 있다고 하는 것은 불교나 이방종교의 주장과 같다. 불교의 주장이 무엇인가? 사람 안에 불성이 있는데 깨닫지 못해서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깨달아서 찾겠다는 것이 불교다. 사람 안에 영생이 있었다면 내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나도 깨달아서 잃어버린 것을 찾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각각의 세계에는 거기 맞는 몸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40절에 ‘하늘에 있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니라.’ 했다. 하늘에 속한 몸이 있고 땅에 속한 몸이 있는데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땅에 속한 몸은 영-씨가 아니다. 하늘에 속한 몸은 영으로 씨다. 하늘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예표하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피조물은 소멸되지 않는다. 영이란 하나님을 대표하고 생명을 대표하기 때문에 영적인 것은 피조 되었다 하더라도 소멸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의 영과 혼도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영적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소멸되지 않는다. 사람의 구성체인 영, 혼, 몸 중에 영과 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구성체이다. 그래서 비록 창조되었지만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육체는 흙으로 창조되었기에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천사는 몸 자체가 영으로 창조되었다. 천사가 영으로 창조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될 수 있는 것이고 거듭남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탄은 영이기 때문에 하나의 씨로서 흙-사람과 연합하여 자기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 그래서 마귀는 씨로서 흙-사람과 연합하여 마귀의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요8:44a)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리니....’(요일3:10)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그분의 씨를 흙-사람에게 뿌려 하나님의 자녀를 생산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하고 있다. 거기서 사람을 길가의 땅, 돌밭의 땅, 가시나무 사이의 땅, 좋은 땅 등 네 종류의 땅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계신다.(마13:18~23) 사람은 땅으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좋은 열매를 맺어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왕국의 자녀들이로되, 가라지는 저 사악한 자의 자녀들이니라.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마13:38~39a)

밭은 세상이라는 말은 밭이 사람이라는 의미다. 사람은 밭으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그 아들을 생산해야 할 운명이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본질이 흙이다. 자동차의 본질은 쇠다. 쇠를 가지고 어떤 기능이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나무를 가지고 어떤 기능이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나무라는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탄은 영으로 만들어졌다. 타락했다고 영이라는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흙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살아 있는 혼이라는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뿌리는 대로 거둔다는 말도 진리고 신토불이(身土不二)라는 말도 진리다. 어떤 존재에게는 두 가지 면이 있다. 위치적인 면과 기능적인 면이다. 자동차의 주인이 바뀌는 것은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자동차의 기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바뀌었다고 해서 기능이 바뀐 것이 아니다. 위치가 바뀌었다고 기능까지 바뀐다면 우리의 거듭남도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위치가 바뀌었지만 말씀을 받아드리는 기능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 말씀을 먹고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단지 흙이고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밭에 사탄의 씨가 뿌려지면 사탄의 자녀가 태어나고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면 하나님의 자녀가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그래서 씨를 뿌리고 열매를 수확하는 원리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을 이루어 나가시는 대원칙이다. 하나님의 씨를 받은 사람은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를 받은 사람은 불의한 자의 부활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 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나니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24:15)

씨의 소망은 열매다. 영과 씨와 열매는 생명으로서 하나다. 사람은 육적인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변화해야 영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활한 영적인 몸을 가진 사람을 열매라고 하시는 것이다.(고전15:20)
성경은 또 사람을 그릇으로 표현하고 있다.(롬9:21~24) 고린도후서에서는 우리가 질그릇 안에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나니.....’(고후 4:7)

성막 안에는 증거판을 보관하는 증거궤가 있었다. 여기서 증거판은 하나님을 예표하고 증거궤는 육신을 예표한다. 사람은 무엇을 담는 궤짝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타락하기 전부터 흙이고 그릇이다. 사람은 흙과 같고 그릇과 같이 무엇을 받아드릴 자였다. 본래부터 하나님의 씨를 받을 자였지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가 아니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 창조되었다. 여자는 씨가 없는 그릇이다. 우리는 이 관념이 명확해야 한다.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여자가 아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부터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다. 하나님의 목표는 아담이 아니고 이브다. 그래서 아담은 죽음을 통해 이브로 거듭나야 했다.(창2:21~23) 이브는 부활생명의 예표인 교회로서 하나님의 최종 목표다. 지구상에 어떤 존재도 영-씨로 창조되지 않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육체-흙으로 창조되었다. 살과 피는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전15:50) 사람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지 영생을 얻은 자가 아니었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하시고’(창3:22)

위 성경구절에 의하면 분명히 아담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았으며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다. 일부 주장처럼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아 들여 거듭날 자였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은 흔히들 사람이 거듭나야 되는 이유를 죄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이 죄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거듭나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죄 용서를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최종목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담은 무죄하였지만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다. 무죄는 단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다.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죄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데 하나의 장애물이지 죄를 용서받는 것이 최종목적이 아니다. 인생은 살과 피로 지음받았고 근원적으로 거듭나야할 존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