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전쟁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

올더스조에 2014. 5. 28. 23:15


6.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침례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마3:13-17) 우리는 통상 침례는 죄인에게 행하는 십자가의 심판을 상징하는 의식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데 왜 이 땅에 오셔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을까? 여기에 대한 해석이 없다. 있더라 하더라도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데 죄인의 모습으로, 곧 아담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침례를 받았다고 해석한다. 또 요한은 왜 침례를 행했는가? 성경은 예수님이 침례를 받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마3:13) 하셨다. 그분이 침례를 받자 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는가? 지금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첫 번째 죽음은 창조 안에서 사람에게 정해준 운명이고 하나님의 목적과 경륜을 위한 필수 과정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이것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된 사람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신들과 같이 되어 인생의 죽음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런데 참 사람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서 인생에게 하나님이 정해 놓은 죽음을 인정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라는 진실을 인정하신 것이다.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골1:15)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해주신 운명을 인정하신 것이다(시39:4)


주여 나로 하여금 내 종말과 내 날들의 한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사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하소서(시39:4)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죽음을 선포한 자를 기뻐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이래로 그토록 고대하던 사람이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시기 전에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마3:15) 하셨다. 사람들은 의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렇게’란 그분의 죽음을 발표하겠다는 것이다.
의는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의란 하나님이 창조 안에서 정해주신 바른 인생의 위치(인격)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의도 나타나는 것이다. 의가 있다면 의가 나타나는 것이며 의가 없다면 의는 나타나지 않는다. 태양은 있기 때문에 매일 나타난다. 달은 있기 때문에 매월 나타나는 것이다. 생명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의는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의는 나타나는 것이다. 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의가 있는 사람은 의가 나타나고 불의가 있는 사람은 불의가 나타난다. 아담은 의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불의뿐이다. 소나무에는 송진이 있다. 그러므로 찌르면 송진이 나온다. 소나무에는 향기가 있다. 그러므로 건드리면 소나무 향기가 나는 것이다. 만드는 것은 모두 가짜다. 나타나는 것만이 진실이며 진짜다.


죄를 씻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를 나타내려고 요단강에 나왔다. 죄를 씻어도 의는 나타나지 않는다. 의가 있는 자만이 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죄는 사람에게 묻어 있는 그 무엇이 아니다. 그 사람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씻어지지 않는다. 씻을수록 더욱 죄가 드러날 뿐이다. 돌을 씻으면 돌이 더욱 드러날 뿐이다. 사람은 씻을수록 오히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것만 드러났을 뿐이다.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을 표현하면서 의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은 흙이며, 숨이 코에 붙어 있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 인생은 죄와 관계없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다.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이것만이 영원한 진실이다. 천지는 변해도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부인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며 이것을 숨기는 모든 것이 불의다. 사탄은 선악을 아는 지식을 줌으로써 이 불변의 진실을 은폐시켜 사람으로 교만에 빠지게 하였다. 이것이 불의다. 주 예수님은 이것을 폭로하였다. 죽음만이 진실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예수님의 의다. 의로워지려고 하지 말라.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생의 바른 위치, 곧 의를 발표했을 뿐이다. 당신도 당신의 의를 발표하라. 당신 자신을 발표하라. 진실하게 발표하라. 그러면 의가 나타날 것이다. 소나무가 소나무를 발표하면 향기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왜 고치려고 하는가. 왜 만들려고 하는가. 진실하게 발표하라. 그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우리의 의다. 주 예수님 안에서 발표하라. 아담 안에서 발표한 당신은 가짜다. 아담이 가짜이기 때문이다. 그는 속은 자다. 그는 자기를 발표할수록 불의해지기 때문에 은폐하고 씻고 고치며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불의가 드러날 뿐이다. 주 예수님 안에서 발표하라. 숨이 코에 붙은 인생을 발표하라. 피조물임을 발표하라. 나는 그의 것이라는 것을 발표하라. 그러면 의가 드러날 것이다.
요단강에 나온 모든 사람은 씻고 고치고 만들려고 나왔다. 오늘날도 마찬가지다. 씻고 고치고 만들어 보려고 교회에 가고 절에 간다. 그럴수록 그러려고 하는 당신의 마음만 드러날 것이며 아무것도 달라질 것은 없을 것이다. 그럴려는 마음이 불의를 증거한다. 모든 일을 중지하라. 그리고 주 예수님께로 돌아서라. 의를 발표하는 분에게로 돌아서서 그 의를 마시라. 우리에게는 의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을 발표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이끌고 요단강에 나와서 십자가의 심판 이전에 죽음을 발표하셨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대표한 것이다. 무엇이 묻은 줄 알고, 무엇이 좀 잘못된 줄 알고 씻고 고치려고 나온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은 죽음을 발표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유대인의 선생이며 공회원인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 하셨다. 니고데모는 무엇을 좀 더하려고 예수님께로 왔던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을 더할 것이 아니라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 아니라 우리의 생명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옛사람은 죽는다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생이 죽는 것은 죄 이전에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은 여기서 속았다. 죽지 않고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사탄의 속임수에 속은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죽음을 발표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잃어버린 위치를 찾아야 한다. 의는 생명의 문제며 위치의 문제다. 죽음은 우리에게 있으며 생명은 하나님에게 있다. 우리는 죽음을 발표하고 하나님은 생명을 발표한다. 우리가 죽음을 발표하면 그것이 의이고 하나님이 생명을 발표하면 그것이 은혜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대표하여 죽음을 발표했고 하나님은 생명을 발표하는 표시로 비둘기를 보냈다.(마3:16) 아담은 하나님의 깊고 높은 죽음의 경륜을 거부하고 사탄에게 속아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의 근원적 위치를 선포하고 계신다. 이 위치가 하나님과 사람의 바른 관계다. 하나님은 이것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생명은 사람-흙을 찾아간다. 죽음을 발표한 자는 의롭고 생명을 발표한 자는 은혜롭다. 발표된 죽음 앞에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 진노의 하나님은 비둘기 하나님이 되어 아들 위에 임하셨다. 지금도 그러하고 전에도 그러했고 장차도 그러하실 하나님은 참되시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인류를 대표한 죽음을 발표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는 인정을 받았다. 그 후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셨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아들로 인정되어야 하고 사탄에게 이겨서 만유를 다스리고 지배할 하나님의 대리자로 높임을 받아야 한다. 아담이 이 지위와 권세를 빼앗겼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 우주적 회복의 선두에 서야 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두주자이신 주님이시다.
‘그 때에’(마4:1)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죽음을 발표한 침례로서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성령이 비둘기같이 그 위에 임하심을 보면서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란 말씀을 들었을 때다. 주님께서 의를 이루심으로 진노의 하나님은 비둘기 같은 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드러나셨다.
아브라함은 할례를 받고 나서야 약속인 이삭을 받았으며 이스라엘은 문설주에 바른 피로 구원을 받았다. 우리의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들로 살리시고 아버지가 되신다. 이것이 우리 존재의 회복이다. 주 예수님은 침례로 사람의 존재를 회복시키셨다. 그리고 승리로 권위를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가셨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유를 다스리고 지배해야 한다. 아담은 존재를 상실했기 때문에 권위도 상실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멸망(존재와 권위의 상실)에 이르렀다. 아담은 사탄에게 실패하므로 온 인류를 천사의 수하에 들어가게 했다. 인류는 천사의 수하에서 하나님을 경배했고 도처에서 종교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고 새 인류의 머리가 되기 위하여 아담을 속였던 이 시험하는 자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하나님은 이 우주적 대결을 위하여 그 아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셨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갔다. 첫사람 아담은 이 시험에 실패했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 아담은 이 시험에 이겼다. 이 시험에 이기는 자가 마지막 사람 아담이 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에 불과했지만 마지막 사람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전15:45). 첫 사람 아담은 사망을 주었지만 마지막 사람 아담은 생명을 주었다. 이는 그분이 이 시험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전쟁에서 인생은 한 번 죽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창조 안에서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셨다. 그러자 마귀가 물러가고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수종 들었다. 사람이신 예수님이 신인 마귀를 이긴 것이다.


우리는 신(천사)들과 같은 자가 될 자가 아니고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을 계승해야 하고 육체로서 아버지를 나타내야 할 자다. 하나님에게 육체를 가지시게 해야 할 자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육신을 산 제물로 그에게 드려야 한다. 뒤집혀진 우주의 질서를 바꾸어 천사들로 사람에게 수종들게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진실에 달려 있다. 주 예수님 안에서 우리도 죽음을 확인하고 발표하자! 이것만이 진실이다. 우리가 이것을 감추어 두고 다른 진실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곧 가증한 종교다. 교리나 조직이나 무슨 행위나 실행으로 구원에 이르려고 하지 말라. 그것이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희생물과 헌물이 아닌 상한 영이라고 했다. 죽음이 아닌 모든 것들은 희생물과 헌물이다. 주 예수님은 희생물과 헌물로 나아가지 않으셨다. 교리나 조직이나 무슨 지식으로 나아가지 않으셨다. 갈릴리로부터 요단강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을 뿐이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발표했다.


사실상 모든 제물은 죽음을 발표하는 것이다. 산 채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한 제물 대신에 어떤 교리나 지식도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다. 제물을 드리기 위하여 기록된 모든 율법이 있고 또 옳을지라도 결국 드려지는 것은 제물뿐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과 교리와 교훈은 참된 제물을 드리기 위한 것이며 이 제물은 우리 자신이며 합당한 우리 자신은 죽음을 발표한 자인 것이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죄 때문에 첫 번째 죽음이 왔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죄의 결과 죽음은 두 번째 사망이다.(계20;14) 첫 번째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정해진 것이다. 이 첫 번째 죽음이 없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을 수 없다. 아담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첫 번째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피조물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고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창조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죄와 관계없이 내 죽음을 발표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상 생소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죽음을 발표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 앞에 피조물로서, 사람으로서 합당한 위치를 인정하는 것이다.(시39:4)


주여 나로 하여금 내 종말과 내 날들의 한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사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하소서(시39:4)


이것이 우리의 진실을 가지고 거짓의 아비인 사탄을 이기는 것이고 하나님과 사람의 합당한 관계로서 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발표하고 의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된 우리의 영은 사탄의 모든 계교를 능히 물리치고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고 나라와 권세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정통적 교리나 이단적 교리나 죽음이 없는 것은 모두 무효다. 당신이 무엇을 믿든지 당신의 죽음이 발표되지 않는다면 모두 무효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우주적 회복에 참예할 수 없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죽음을 발표하고 광야에서 사탄과 싸우셨다. 사탄의 시험을 통과하고 난 후에 천사들에게 수종받으셨다. 죽음만이 사탄을 정복하고 인권을 회복하며 나라와 권세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는 유일한 길이다. 아멘

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며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니라.(요일5: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