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의 전쟁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올더스조에 2014. 5. 28. 23:13

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이 문제를 한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까 한다. 앞서도 말씀드렸지만 사망에 대한 관점을 달리 생각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사람의 사망을 인간의 육체적 죽음에 초점을 맞춘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로 본다. 육체가 살아 있다하더라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있다면 죽은 것이다.(엡 2:1, 골 2:13)


살아있는 혼으로 창조된 사람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육신적인 몸이 영화로운 몸으로 거듭나는 것이 정상적인 순서이다. 사람은 원래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였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창조되지 않았다. 만일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의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받아들였다면 육신적인 몸이 영생을 가진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육신적은 몸은 끝난 것이니까 죽었다고 보아야 한다. 옛 것을 끝내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 갈수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의 세계와 새의 세계는 다른 것이다. 새로운 생명으로의 전환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옛 생명은 죽고 다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즉, 사람의 생명인 살아있는 혼에서 하나님의 생명인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화로운 몸으로 전환하려면 옛것은 죽음을 통해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이 그렇지 않은가? 가을에 열매를 맺었던 식물이 다음 해에 부활하려면 겨울에 죽어 땅에 뿌려져야 한다. 바울은 고린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해 말할 때 이 우주적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고전 15:36)


위 말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담이 죄를 지은 후, 사람의 육신에 죽음이 왔고 이후 예수님을 믿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피조물이란 관점에서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법칙은 똑 같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만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믿지 않는 사람도 부활한다. 한 부류는 생명의 부활로, 한 부류는 멸망의 부활로 마지막 때에 부활한다. 이것을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씨에게는 고유의 몸이 있고, 죽어서 몸의 씨가 뿌려지면 봄에 다시 새 싹이 나듯이 사람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씨가 뿌려진 몸은 생명의 부활로, 사탄의 씨가 뿌려진 몸은 사망의 부활로 나타는 것이다.
우주적인 수확기인 가을이 있고 그 씨에 따라 새롭게 태어나는 봄이 있다는 것인데, 아담은 생명의 노선을 이탈하여 육신이 죽지 않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사망노선을 가느냐, 생명과를 먹고 생명노선으로 가느냐 이 문제였다. 죽음과 생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십자가 앞은 죽음이었지만 뒤는 부활이 있었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을 의미하지만 피 흘림은 죽음을 의미한다. ‘물’도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이렇듯이 죽음은 생명으로 연결되는 다리이다. 생태계의 원리가 그렇다.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영생이 없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큰 것을 좋아하지만 큰 것은 제한이 있다. 태양이 아무리 크더라도 그 크기는 제한이 있고 영구하지 않다. 그러나 작을수록 제한이 없다. 공기는 수많은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공기는 태양보다 무한히 크고 영원하다. 그러므로 ‘죽음’이란 공기와 같이 모든 것이 다 소멸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다. 여기에 영생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죽어서 없어졌는데 영원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아담은 육체적 죽음 뒤에 있는 생명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고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사망노선으로 갔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생명노선 안에 있었기에 부활하신 것이다. 물론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나무의 열매이시지만 표면적으로는 아담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님도 결국 아담과 같이 선악과와 생명과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셔야 했던 것인데 예수님은 생명과를 잡수셨기에 처음 인간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운명대로 육체적 인간에서 영광스런 부활체로 살아나신 것이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정해주신 인생이라는 위치, 곧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으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생이라는 위치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께서 그분을 높이 올리셨다고 말씀하고 있다.(빌2:8~9) 그렇다면 지금까지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면 그들은 왜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었고 영화롭게 부활하지 못했을까? 그들은 사탄이 빼앗아간 인생의 위치를 회복시키지 못했고 여전히 선악과를 먹고 죽었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도 장차 멸망의 부활로 부활하여 불 호수에 들어 갈 것이다.(계21:12~14)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거듭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고 이것은 성경전체를 관통하는 진리다. 아담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을 거부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사탄을 이기시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셨다. 이기는 자에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진리다.(계2:7) 생명나무의 열매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주신 격이고 운명이다. 열매의 내용은 무엇인가,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고, 흙으로 만들어진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연약하고 한번은 육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 안에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피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흙이라는 운명을 주었을까? 흙에만 하나님은 씨를 뿌리실 수 있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 신이 되겠다고 하면 그것은 흙이 돌이 되겠다는 것으로 씨를 뿌릴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생에게 정해주신 격을 순응하셨다. 아담은 이것이 싫어 선악과 먹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드리셨다. 마귀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꼭대기에 뛰어 내리라고 했을 때 사람은 뛰어 내리면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하고 하셨다. 십자가에서도 마귀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운명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 피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끝까지 순응하셨다.


우리 그리스도인들 사이에 종종 승리하십시오, 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도대체 ‘이기는 자’란 무엇인가? 이 개념도 모호하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성경에서 이기는 자(계2:7)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자다. 곧 하나님께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 인격을 지키라는 것이다. 이 자리가 가장 고귀하고 영광스런 자리라는 것이다. 이 위치를 가지고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자가 이기는 자다. 하나님은 예수님이 인격으로 사탄에게 승리하였듯이 우리 또한 인격으로 이기기를 원하시고 이기는 자게에만 인생으로서의 권위를 부여하신다.


이기는 자에게는 나 역시 이긴 뒤에 내 아버지와 함께 그분의 왕좌에 앉게 된 것 같이 내 왕좌에 나와 함께 앉는 것을 내가 허락하리라.(계3:21)


또 빌립보서 4장 13에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을 개역성경에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라고 오역하여 세상 일에서 하나님의 도움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거짓된 가르침으로 인용되고 있다. 이 말씀 또한 당연히 인격의 승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동안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인격은 늘 원망의 대상이었고 불만의 대상이었다. ‘왜 우리 육신을 이렇게 약하고 능력없고 죽도록 만들어 놓았나?’ 늘 ‘이놈의 육신 때문에 안돼’ 하면서 창조자를 원망하였다. 이것은 사실 사탄의 속임수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인격을 지키심으로 인격의 고귀함과 영광을 보았다. 우리는 이 육신을 벗어나서 어떻게 하면 신들과 같이 되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오셔서 이 연약하고 능력없는 육신을 가지고 마귀에 승리하시고 생명의 부활을 통해 인생의 존귀와 영광을 드러냈다. 인생이 영광스러우니 하나님도 영광스러워진 것이다. 지금도 기독교 안에는 늘 육신 때문에 안된다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안된다는 것은 우리 생각이다. 성막 안에는 말씀과 말씀을 넣어두는 증거궤가 있었다. 예표적으로 보면 말씀은 하나님이고 증거궤는 사람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궤짝이 필요한데 사람들은 궤짝 때문에 안된다고 하면 말씀을 보관할 장소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거하 실 곳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 안에만 거하신다. 그러므로 이기는 자란 인격을 지키는 것이다. 이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예수님만큼 억울하고 한 많은 죽음도 없다. 그렇다고 하나님은 예수님이 불쌍해서 살렸는가? 그렇지 않다. 왜 살렸는가? 그분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다. 인생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서 정해진 것이다. 아담은 이게 싫어서 선악과를 먹었지만 예수님은 내가 아무리 의인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그 위치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은 자신의 목적이 없고 만드신 이의 목적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피조물의 모습으로 창조자의 목적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씨-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탈해서 죽지 않는 신과 같이 된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신과 같은 자에게는 생명을 넣어 줄 수 없다. 돌 위에는 씨를 뿌릴 수 없다. 흙에만 씨를 뿌릴 수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어떤 불만도 없었다. 내가 아무리 의인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인생이 십자가에 매달면 죽도록 만들어 놨기 때문에 그 운명을 담담히 받아드린 것이다. 나는 의롭게 살았는데 죽는 것이 억울하다 이러면서 죽은 것이 아니고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요23:46) 하시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마지막을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숨을 거두신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나의 어떠한 상황과 관계없이 죽기까지 지키신 것이다. 내 목적보다 더 크신 이의 목적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는 것이다. 죽음은 더 좋은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그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아버지와 늘 하나였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원이 예수님의 소원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 하에서도 이 인생의 위치를 지켜야만 하나님의 씨를 받아 새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고, 또 인류에게 그 씨를 분배하여 하나님께서 처음 창조하실 때의 목적대로 생육하고 번성해서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죽기까지 인생의 위치를 지켜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씨로 새로 태어나 새인류의 첫열매(조상, 씨)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 안에서 정해진 죽음이라는 인생의 운명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생명나무의 열매의 핵심 내용물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를 믿되 생명나무의 열매의 내용물을 먹지 않고 껍데기만 먹고 있다. 껍데기는 사람 안에 들어와 생명이 되지 않는다. 열매의 내용물을 먹어야만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생명이 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이 나의 죄를 위해 대신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대신이라 의미도 몇 군데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일관된 진리는 함께 죽고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현재는 일어나지 않았지만 미래에 가시적이고 실제적으로 일어나는 일이다. 더 근원적으로 들어가면 하나님은 영이시고 피조물은 형상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아버지와 아들, 씨와 열매, 실재와 형상의 관계다. 즉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실재고 보이는 피조물은 형상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이 참이고 실재라는 것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히11:1)라는 말씀도 여기서 근거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라디오를 듣거나 TV를 보더라도 보고 듣는 것은 실재가 아니고 형상이다. 실재는 전파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것이 실재라는 것이다. 또 내가 어떤 행위를 한다면 그 행위 이전에 마음속에 하고자 하는 말씀(영)이 있다. 그 말씀이 실재고 행위는 형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말씀(영)이 실재고 먼저지만 그 실재에 대한 결과는 형상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모든 믿음의 결과는 차후에 형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면 함께 죽고 함께 산다 했을 때 부활을 믿는 다면 죽음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만 혼자 죽고 우리는 육신이 죽지 않고 부활에만 동참하는가? 그렇지가 않다. 예수님은 새인류의 조상이고 첫 열매다.(골1:15)

 

첫 열매가 거친 과정을 후속 열매들이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추수에 이른다. 우리는 종교적이고 구름위에 떠다니는 실체가 없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분이 대신했다고 어떻게 내가 구속되는가? 우리도 똑 같은 과정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없이 우리는 구속될 수 없다. 물론 우리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똑 같이 지라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이 지신 십자가를 우리도 동일하게 짊어지지 않는다는 면에서 보면 분명 대속이고 은혜지만 그렇다고 우리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가 보여주는 것은 아무리 사람이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신과 같은 삶은 살고 완전한 인간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해신 주신 운명(격)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에게 창조 안에서 육신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어떠한 상황하에서도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격을 지켜야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운명이고 인생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마귀와의 위치전쟁을 통해 인생에게 정해준 죽음이라는 운명(인격)을 철저히 인정하시고 지키셨다. 그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에게 창조 안에 정해진 죽음이라는 진실을 거부하면 자신이 알건 모르건 도로 선악과를 먹고 신들이 되고 싶은 상태로 돌아가는 형국이 된다.


그러므로 마귀와의 전쟁은 진실 대 거짓의 싸움이다. 죽도록 창조된 것이 인생의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마귀에게 속아 죽지 않는 신처럼 산다는 것이다. 거짓으로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어떤 이는 그럴 것이다. 아니 사람들 중에 누가 자신이 영원토록 산다고 하는 사람이 있느냐? 지금까지 사람들은 다 죽었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 안에 인생에게 정해 놓은 죽음이란 운명(위치)안에서 죽었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핑계없는 무덤은 없다’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모두가 핑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운명에 순응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좀 더 살았으면 하고 한을 가지고 죽었다는 것이다. 결국 천사를 사모하고 죽었다는 것인데 이는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은 자가 되어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자살을 하는 것도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도 인생이라는 위치를 원망해서 선악과를 먹은 거와 같이 자살이란 인생을 원망하는 것이다. 피조물인 내가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것은 창조자를 원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 안에서 정해 놓은 인생이라는 위치 안에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정해 놓은 죽음이라는 운명을 보았다. 그분은 무고한 죽음 앞에서도 인생을 원망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과 같이 어떤 핑계도 대지 않았다. 능력있고 죽지 않는 자 사탄 앞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위치를 당당히 지킴으로 세상으로부터는 버림받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정해 놓은 코스대로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살리신 것이다. 아담은 자신을 원망함으로 하나님을 원망했지만 예수님은 그 위치를 당당히 지킴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광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분을 다시 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담은 죽지 않는 천사가 부러워 사람의 위치를 버렸지만 예수님은 육신이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천사보다 더 좋은 부활을 얻음으로 인생의 존귀와 영광을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