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죽은 자와 산 자

올더스조에 2012. 3. 17. 12:31

만물의 생명의 법칙은 죽음을 통해 연결된다. 예를 들어 낮은 생명의 풀과 높은 생명의 소가 있다고 하자. 풀이 소가 되려면 풀은 죽어서 소가 먹어야 하고, 소가 풀이 되려면 소는 죽어 풀의 거름이 되어야 한다. 이렇듯 높은 생명과 낮은 생명의 공통지점은 죽음밖에 없다. 고로 십자가는 하나님이 사람에게 오는 지점이며 사람이 하나님께로 가는 지점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성경에 많은 이야기가 나오지만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결심하였다(고전2:2)고 하였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영생하도록 창조했는데 아담의 죄 때문에 육체적 죽음이 온다고 말한다.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그러나 이것을 다시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날(the day)에 죽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 거룩, 생명, 죽음 등은 모두 세상의 관념과 다르다. 모든 것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말하고 있다. 죄의 의미도 ‘과녁을 빗나가다’인데 이는 곧 피조물인 사람이 하나님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한 것을 말한다.죽음도 하나님의 관계가 단절된 것을 말한다. 사람은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니까 실재는 영이신 하나님이고 사람은 형상이라는 것이다. 실재와 형상, 곧 씨와 열매의 관계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은 발전소이고 사람은 전구와 같은 것이다. 전구에 불이 들어오려면 전선이 발전소에 연결되어야 한다. 사람도 완성이 되려면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 곧 연합되어야 하는데 바로 이 관계가 단절된 것이 죽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2:17절의 죽음이 육체적 죽음이 아닌 이유는 다음과 같다.


1. 만약에 이 말씀이 육체적 죽음이라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바로 그 날(the day)에 반드시 육체가 죽어야 했기 때문이다.

로마서 5:12절의 말씀도 분명히 육체적 사망이 아닌 하나님과의 분리를 말하는 영적사망을 말한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5:12)


2. 피조물은 기본적으로 영원한 생명이 없다. 영원한 생명은 오직 하나님께만 있다. 사람은 창조될 때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있었지 영원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담은 생명나무를 먹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가질 수 가 있었다.


3. 성경에서 사망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과의 분리를 말한다. 육체적으로 살아 있으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서 분리되어 있다면 죽은 자이다

또 그분의 제자들 가운데 다른 사람이 그분께 이르되, 주여, 먼저 내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지내게 허락하옵소서, 하거늘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또 죽은 자들이 자기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지내게 하라, 하시니라 (마:21-22)


예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의 육체적 죽음에 대해 ‘잔다’라고 표현하셨다.

그들에게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하시니(마9:24)

성경에서 살았다. 죽었다함은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냐? 아니면 산 자냐? 이것이 핵심이다.

그분께서는 죽는 것을 통해 친히 죄에 대하여 단 한 번 죽으셨으나 살아 계심을 통해 친히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시나니 (롬6:10)

이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참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께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산 자로 여길지어다. (롬6:11)

내가 율법을 통해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것은 내가 하나님께 대하여 살고자 함이라.(갈2:19)

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하시니 (요11:25-26)


위 말씀의 밑줄 해석은 살아서 믿는 자는 주님이 재림하시면 휴거하여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된다는 의미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의 관점은 사람의 육체적 삶과 죽음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느냐, 살아 있느냐?에 있다.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는 육체적 삶과 죽음에 관계없이 산다는 의미일 것이다.


4. 또한 성경은 구원받지 못한 사람을 육체가 살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죽어 있는 상태로 표현한다.

또한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2:1)

또 너희의 죄들과 너희 육체의 무할례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께 살리시고 너희의 모든 범법을 용서하시며(골2:13)


즉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아담 안에 있는 자)는 육신이 살아 있어도 죽은 자이다.


5.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람의 최종상태는 현재의 육체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체에서 보듯이 생명나무이신 예수그리스도의 생명과 연합하여 부활한 영광스런 몸이다.

물론 어떤이는 아담이 생명나무를 먹었다면 죽지 않고 영광스런 부활의 몸을 유지하였을 것이라고 아래 말씀을 근거로 이야기 할 지도 모른다.

누구든지 살아서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요11:26)

그 뒤에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그들과 함께 구름들 속으로 채여 올라가 공중에서 주를 만나리라.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7)


그러나 위 말씀에서 우리의 육체는 부활체다. 자 그러면 생각해보자, 현재의 육체가 아니라 부활체로 변화되는 순간, 나의 옛 육체는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죽는다고 밖에 할 수가없다. 엄연히 예수 그리스도도 죽고 다시 사셨다. 새사람(새인류)의 첫열매(조상)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도 죽으신 다음 부활의 몸을 입으셨다. 그러할 진대 어떻게 우리의 현재의 육체가 죽지 않는다고 할 수 있겠는가? 썩을 몸이 썩지 않을 영광스런 몸으로 된 것은 죽고 다시 산 몸이다.(빌3:21). 실제적으로 옛사람이 십자가에서 죽고 새사람이 된 것이다(롬6:5) 만물의 생명의 법칙이 다 그러하다. 죽음을 통해서만 새로운 생명으로 연결된다. 요11:26절과 살전4:17절은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될 때에 사람이 육체적 죽음을 자신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현재의 썩을 몸과 부활체는 차원이 다르다. 그것은 옛사람이 죽고 다시 산 몸이다.


이로 보건대 최초에 아담이 생명나무를 먹고 영광스런 몸으로 변화되려면 아담의 육체는 그가 느끼건 느끼지 못하건 죽어야 된다는 결론이 나온다. 사실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이유 중에 하나는 부활 이후에 영화로운 몸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 부족해서 육체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최종적인 상태(부활체)에 이르려면 그는 죽어야 했던 것이다. 사탄이 아담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신들과 같이 된다고 유혹했는데 신이란 천사이며 천사는 죽지 않는 영적 피조물이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천사보다 조금 낮게 창조되었다(시8:5). 바로 아담은 천사의 죽지 아니함을 부러워해서 천사가 된다고 속이는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5. 위의 말을 확증하는 것으로 창세기2장에 등장하는 생명나무를 히브리어로 ‘크세논’이라고 하는데 이 의미는 목재(Wood), 즉 죽은 나무이다. 상식적으로 맞지 않는 말이다. 생명나무가 어떻게 살아 있는 나무가 아니고 죽은 나무겠는가? 곧 생명나무는 십자가라는 것이다. 어쩌면 아담은 십자가(생명나무)를 보았지만 십자가 뒤에 있는 영광을 보지 못하고 십자가를 피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를 지셨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은 죽음=생명이다. 십자가 앞에는 죽음이 있고, 뒤에는 생명이 있다.


원래 사람에게는 육체적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었을 것이다. 타락하면서 생명나무를 거부하면서 두려움이 생긴 것이다. 하나님께서도 자신의 목적을 이루시려면 사람은 육체적 죽음을 맞이 해야 한다. 사람의 육체적 죽음은 본래 하나님께 기쁜 것이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의 죽음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 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

내게는 사는 것이 그리스도시요 죽는 것이 이득이니라. 그러나 내가 육체 안에 산다면 이것이 내 수고의 열매이니라. 그럼에도 내가 무엇을 택할지 알지 못하노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기를 바라며 내가 둘 사이에 끼어 있느니라. 그것이 훨씬 더 좋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육체 안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해 더 필요하니라. (빌1:21-24)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


6. 계시록 13:8절에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에 대한 여러 가지 해석이 있지만 역사적으로도 생명나무가 곧 십자가라는 의미가 있다는 데서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어린양이신 주님은 이미 창세로부터 생명나무(십자가)라는 죽음을 통해서 사람에게 영생을 주기 위한 모든 준비를 마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과 사람의 생명은 너무도 다르기 때문에 하나님을 본 자는 죽어야 된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그분도 죽어야 하시지만 우리도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구약에서 하나님을 본 자는 죽어야 하듯이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본 자도 죽어야 하는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창세기 2:7절의 옛 창조안에서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의 숨을 불어넣기 위해 죽으셔야 했던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는 지점은 죽음뿐이기 때문이다.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라는 말씀이 생명나무와도 연관이 있지만 창세기 2:7절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사람의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하나님은 죽으셔야 했던 것이다.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인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의 모형인 아담이 잠들어 있는 상태(죽음)에서 사람의 모형인 이브를 산출했기 때문이다. 사람(여자)도 아기를 낳을 때 죽음(피흘림)을 통해서 아기를 낳듯이 하나님도 죽음을 통해서만 아들을 낳으신다.


그분은 사람을 얼마나 사랑하시길래 창세로부터 죽음을 통해 사람에게 생명을 주셨을까?

... 내가 내 생명을 다시 취하려고 그것을 버리기 때문이다(요10:17)


그러므로 어쩌면 우리는 죄와 관계없이 피조물로서 하나님 앞에 죽음을 선포한 자만이 하나님께 대하여 산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셨을 때 죄 없으신 분이기에 죽음을 상징하는 침례를 받을 실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례요한에게 침례 받으셨다, 그분은 죄없으셨지만 하나님앞에 죽음을 선포하시자 그때 하나님께서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라고 하셨다. 모든 피조물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목적이 없다. 지으신 이의 목적만이 있을 뿐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실재가 아니다. 100인 하나님이 형상을 통해 표현되려면 형상은 0이 되어야 한다. 100더하기 3은 103이고 100더하기 50은 150이 된다. 하나님께서 온전히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을 통해 드러나려면 사람은 제로, 곧 죽어야 한다.

우리는 모두 피조물로서 하나님 앞에 죽음을 선포해야 한다.


성경에서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의 관점은 육체적 죽음을 이야기 하지 않는다. 육체적으로 살아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대하여 죽어 있으면 죽은 자이다. 아담안에서 모든 사람은 죽은 자이다. 아버지는 아들의 근원이다. 고로 생명의 관점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다. 내가 생명의 근원인 아버지와 단절되면 아버지 집에서 나는 죽은 자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 대하여 산 자의 하나님이다.

나는 아브라함의 하나님이요, 이삭의 하나님이요, 야곱의 하나님이니라, 하셨으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요, 산 자의 하나님이시니라, 하시매(마22:32)

창조주와 피조물의 간격은 하늘과 땅의 간격보다 크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직접적으로 생명을 줄 수가 없다. 상호 생명이 만나는 접점이 있어야 한다. 하나님은 죽음을 통해서만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