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21.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실재(實在)이신 분

올더스조에 2025. 3. 9. 10:48

 
 

1. 들어가는 말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법과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롬 5:14)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라는 의미는 아담이 모형(模型)이라면 예수님은 실재(實在)라는 의미로 다른 말로 하면 아담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이 없는 상태로 창조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있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아담이 모형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실재로서 하나님의 창조 목표이다. 제조업자가 어떤 상품을 만들어 판매하고자 한다면 아담은 목업(mock up), 즉 모형이고 예수 그리스도가 실재 상품이라는 의미다. 또한 모형은 아파트 건축시 모델하우스와 같은 의미로 실재 아파트가 지어지면 모델하우스는 해체하는 거와 같은 이치다. 그래서 어차피 아담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모형으로서 실재가 오면 그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2. 아담은 실재(實在)가 아니라 모형(模型)임

 
바울이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라는 말을 하게 된 배경을 알아보자. 로마서는 바울이 로마교회 성도들에게 보낸 서신이다. 당시 로마교회 성도들은 죄형법정주의(罪刑法定主義)에 입각해 ‘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라는 로마법에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율법이 올 때까지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5:13)
 
그래서 바울은 죄형법정주의에 입각해 율법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해 보니 모든 사람이 죄인이고 형량은  사형이라는 것을 논증하고 있다. 즉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그 죄를 율법으로 판단해 보니 사망이라고 논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 5:12)
 
그렇다면 두 가지 의문이 생긴다. 첫째는 만일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의문과, 둘째는 죄형법정주의에 입각해 법이 없을 때는 죄가 없다고 했으니 아담부터 모세까지 율법이 없을 때의 사람은 어떻게 되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 대한 답으로 바울은 로마서 5장 14절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법과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롬 5:14) 라고 답을 하고 있다. 즉 설령 아담이 범죄하지 않고, 율법이 없다 하더라도 사람들 위에는 사망 군림할 수 밖에 없었는데 이는 아담이 실재가 아니라 모형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늘 아담의 죄 때문에 사망이 왔다고 말한다. 물론 그것도 맞는 말이지만 성경이 말하는 진리는 어차피 아담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모형이기 때문에 사망이 군림할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아담 안에는 영원한 생명이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인데 아담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이 없는 혈과 육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그에 맞는 생명과 몸을 가져야만 들어 갈수 있는 것이다. 설령 아담은 죄가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생명이 그 왕국이기 때문이다. 동물의 생명을 가지면 동물의 왕국에 살수 있고, 새의 생명을 가지면 공중에 살 수 있고, 물고기의 생명을 가지면 물속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도록 창조되었고 사망이 군림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영원한 생명, 곧 씨를 가진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흙 사람에게 씨를 이식하고, 이 씨를 이식 받은 사람은 죽은 다음 영적인 몸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운명을 정하신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사람의 운명이 본성에 속한 몸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몸으로 전환되도록 운명이 정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6)
 
그러므로 우리는 죄 때문에 육신의 죽음이 왔다고 하는 개념은 잘 못된 것이라는 알아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지 육신의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비록 육신이 살아 있으나 하나님과 관계가 단절된 사람은 사망 안에 있는 것이다. 

 

바울서신 중에서 로마서가 이방인들을 위한 대표적인 복음서라면 히브리서는 유대인들을 향한 대표적인 복음서이다. 아마도 초대교회 당시에 구약을 잘 알지 못하는 이방인들의 입장에서는 히브리서를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있었을 것이다.  바울은 구약에 익숙한 유대인들에게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계시하기 위해  다양한 방식(성막, 성전, 절기, 구름기둥과 불기둥, 율법, 제물, 대언자 등) 방식으로 말씀하셨지만 이제는 실재이신 자신의 아들을 통해 말씀하셨다고 말하고 있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분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히 1:1-2)

 

'율법은 다가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히 10:1)라는 말씀과 같이 구약은 신약의 그림자이다. 즉 구약은 앞으로 오실 그리스도의 인격을 성막, 성전, 절기, 구름기둥과 불기둥, 율법, 대언자 등을 사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크게 보면 구약은 모형이고 신약은 실재이다이것을 히브리서에서는 바울이 구약에 익숙한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구약의 모세, 천사, 대언자, 율법, 제사의식, 제물  등을 예로 들면서 그러한 것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이제 실재가 왔으니 모형으로 돌아가지 말고 실재를 붙들라고 경고하고 있다. 특히 구약의 총체는 유대인들의 성전의 제사의식에 있었는데 바울은 이것을 단호하게 실재가 아니라 모형, 즉 그림자라고 선언하고 있다

 

이 성막은 현재 곧 이때까지의 모형이므로 그 안에서 예물과 희생물을 드렸어도 그것들이 양심에 관한 한 섬긴 자를 완전하게 하지 못하였으며 이 성막은 단지 먹는 것과 마시는 것과 여러 가지 씻는 것과 육신에 속한 규례들로만 유지되어 개혁의 때까지 그들에게 부과되었느니라.’(9:9)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 (2:16-17)

 

그러므로 구약의 총체는 아담이고 신약의 총체는 그리스도이다. 왜냐햐면 구약 안에 있는 사람들은 첫 사람 아담의 후손이고, 신약 안에 있는 사람들은 둘째 사람 그리스도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롬 5:14)이라는 말씀과 '율법은 다가올 좋은 일들의 그림자'(히 10:1)라는 말씀은 같은 의미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구약은 모형이고 신약은 실재이다. 또 다른 말로 하면 첫째 사람 아담은 모형이고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가 실재이다.

 

‘첫째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고전 15:47)

 

땅에 속한 사람은 모형이고, 하늘에 속한 사람은 실재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하늘에 속한 사람에게 있다.  바울은 구약을 모르는 이방 로마교회 교인들에게는 인류의 조상인 아담을 예로 들면서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하였고, 구약에 익숙한 히브리 교인들에게 아담의 자손인 유대교의 인물이나 제도 등이 모두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말하면서 더 이상 생명없는 모형에 머물지 말고 실재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거하라고 말하고 있다. 


 
 

3.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설령 아담이 범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담은 오셔할 분의 모형’으로서  어차피 사망이  군림할 수밖에 없었는데  또 죄를 허락했을까?    

  
그 이유는 이렇다.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에 이르는 것이다.(딤후 2:4) 그런데 흙 사람이 구원, 곧 영생을 얻으려면 아담은 설령 죄가 없다 하더라도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만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가 있다. 이것을 역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는 설령 아담이 죄가 없다 하더라도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이 땅에 와서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 창세전에 이미 정해진 것이었다.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
 
왜냐하면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실제적인 연합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영이신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라는 것이다.(히 12:29), 즉 하나님은 용광로 하나님이다. 용광로 안에서 모든 물질이 타서 재가 되듯이 하나님과 연합하는 피조물은 모두 재가 되어 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들은 모두 번제헌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이라는 개념에서 창세기 3장의 화염검, 구약의 번제단, 신약의 십자가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기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의 위치로 창조된 것이다. 즉 사람은 번제헌물로 하나님께 드려진 후에 영에 속한 몸으로 전환되는 것이다.(고전 15:46)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영에 속한 몸으로 전환되려면 반드시 씨-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먼저 받아드려야 한다. 아담은 단지 모형으로 씨가 없기에 어떤 씨를 받아 들이냐에 따라 부활의 몸이 결정된다. 곧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믿지 않으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 24:15)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설령 사람은 죄가 없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어야 했다. 아담은 단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으로서 설령 죄가 없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실재로 전환되어야 할 운명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근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죄가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요 16:9)
 
그렇다면 이제 어느 정도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왜 죄를 허락하였는지 눈치를 챈 사람도 있을 것이다. 성경에 의하면 율법은 범죄들로 인하여 더해진 것이며(갈 3:19), 모든 사람은 율법 아래서 죄인이다. 곧 율법과 죄는 동일체다. 그런데 성경은 죄, 곧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라고 말한다.(갈 3:24)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 3:24)
 
사람은 죄가 있건 없건 무조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 들여야만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으로 들어올 수가 있다. 그런데 사람에게 죄가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 드릴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성경의 해석이다. 메시아가 와서 인간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진리는 창세전부터 정해진 것으로서 이것은 인간들이 받아 드릴 수 있는 수준의 지식이 아니었다. 성경은 이 진리를 ‘신비 속에 감추어진 하나님의 지혜’라고 말한다.(고전 2:7) 그래서 이것은 당시에는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하나님은 여하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으로 인도해야 하는 수단이 필요한 것이었다. 낚시꾼은 낚시를 할 때 자기 앞으로 고기를 모으기 위해 떡밥을 뿌린다. 떡밥으로는 물고기를 잡을 수 없지만 낚시꾼의 낚시 바늘 앞으로 물고기를 모으는 역할을 한다. 죄와 동일체인 율법도 마찬가지다. 율법 자체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지만 율법은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함으로서 이 죄로부터 자신을 구원할 구원자를 찾게 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 곧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러한 이유로 인해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친다고 하는 것이다.
 
‘또한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가 넘치게 하려 함이거니와 죄가 넘친 곳에 은혜가 더욱더 넘쳤나니’(롬 5:20)
 
사탄은 아담을 유혹하여 범죄하게 만들었지만 하나님은 오히려 이러한 사탄의 계략을 역이용하여 율법을 통해 사람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방책으로 활용하신 것이다. 씨름 기술에서 역공격이라는 것이 있다. 자신의 기술이 상대방에게 들어갔는데 상대방이 이것을 역이용하여 힘 안들이고 크게 이기는 거와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깊이는 우리가 헤아릴 수 없는 것이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들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 11:33)
 
 

4.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모형이 아니라 실재이신 예수 그리스도임

 
교회 안에서 어떤 사람들은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 없었다는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이는 영원한 생명과 하나님의 경륜에 대한 오해에서 오는 터무니 없는 말이다. 영원한 생명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아담이 창조될 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아담은 생명이 없는 모형인 것이다. 모형이란 말 그대로 생명이 없다는 의미고 실재가 생명이란 의미다.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모형인 아담이 아니라 실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것도 단지 육체로 오신 예수님이 최종목표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최종 수확물이다. 그래서 사람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어나신 예수 그리스도를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로 구성된 하나님의 왕국 건설에 있다. 그런데 물속에 살려면 물고기의 몸을 입어야 하고, 공중에 살려면 새의 몸을 입어야 하듯이 하나님의 왕국은 영원한 세계로서 그 환경에 합당한 몸을 입어야 살 수 있다. 살과 피로 창조된 사람은 설령 죄가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전 15:50)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그 세계에 합당한 생명과 몸을 입어야 하는 것이다. 이에 합당한 생명이 부활생명이다. 이것을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와서 첫 열매, 곧 씨가 되신 것이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 3:16)
 
아담은 흙이지 씨가 아니다. 씨가 실재이다.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그리스도가 되신 것은 그분의 부활 이후이다. 즉 씨가 되신 것은 그분의 부활을 통해 씨-실재가 되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님을 믿되 반드시 죽으시고 다시 사신 그리스도를 믿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그리스도, 곧 씨-실재가 되신 것은 부활을 통해 완성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 15:45)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살려주는 영’ 이란 의미는 ‘생명을 주는 씨’라는 의미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가 씨-실재가 되신 것은 부활이후에 완성된 것이다.
 
 
 

5. 하나님은 사람의 운명을 모형에서 실재로 바뀌도록 정하심

 
하나님의 최종적인 창조 목표는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부활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즉, 이러한 부활생명을 가진 많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이 땅에 가득 차서 하나님의 영광이 이 땅에 넘쳐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책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도 제조업자와 마찬가지로 먼저 모형을 만들고 그 후에 실재를 만드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즉, 모형이 실재로 전환되도록 순서를 정하신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6)
 
하나님은 영이시고, 하나님의 생명, 곧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이 영원한 생명을 창조물인 사람에게 주겠다는 것으로 창조될 수 없는 생명을 창조물에게 주겠다는 의도이다. 그래서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법은 먼저 흙으로 아담을 창조하시되,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만들고 그 안에 생명을 넣어주는 개념을 사용하신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우리가 하나님의 권능으로 말미암아 질그릇 안에 보배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나니 이것은 뛰어난 권능이 하나님에게서 나며 우리에게서 나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고후 4:7)
 
우리는 지금 비록 질그릇 안에 보배를 가지고 있지만 이것이 완전체가 되려면 질그릇이 용광로 안에 들어가 영원히 변치 않는 보석으로 변화되어야 하는 것이다. 질그릇은 깨질 수 있고 변화될 수 있지만 보석은 변치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영원한 변치 않는 새예루살렘에서의 성도들의 모습을 보석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계 21:11) 이러한 변화는 우리가 불 하나님, 곧 용광로 하나님에게 삼켜짐으로 실재적이고 가시적으로 보석이라는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6. 결 언

 
사람들은 아담이 영원히 살 수 있었는데 범죄로 말미암다 육체의 죽음이 왔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오해에서 오는 결과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일 그들의 믿음대로라면 죄없는 예수님은 어떤 상황에서도 육체가 죽지 않아야 한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일반 사람과 다름없이 죽으셨다. 그러므로 죄가 없으면 육체가 죽지 않는다는 말은 틀린 말이다. 

 

아담은 단지 생명이 없는 모형이다.(롬 5:14)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이 생명이 없는 아담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신 방책은 모형을 먼저 만들고 그 안에 실재- 생명을 넣어 주는 방법을 사용하신 것이다. 이를 위해 아담은 모형으로 만들어졌고 예수 그리스도는 실재로 오신 것이다.  특히 육체로 오신 예수님이 실재가 되려면 육체가 죽고 부활을 통해 씨가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