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희생물과 헌물이신 분
희생물과 헌물이신 분
1. 들어가는 말
예수님은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요 5:39) 라고 하셨다.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한 인격이다. 그래서 구약에 등장하는 성전, 제사, 제물, 각종 절기, 제사장, 왕, 선지자 등 이 모든 것은 전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구약은 그리스도를 대신해서 제물을 드린 것이고, 신약은 제물을 대신해서 그리스도를 드린 것이다. 다른 말로 하면 구약은 예수님의 모형인 제물을 드렸던 것이고, 신약은 모형을 대신해서 실재를 드린 것이다. “신약은 구약의 완성이다,”한 말이 그 말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사람에게 있기 때문에 그 제물들이 아무리 많이 있더라도 그 제물들이 인격화가 안 된다면 완성되지 않는다. 결국 인격 안에 와서 완성된 것이다. 성경은 그런 관점에서 봐야 된다. 구약에 있는 모든 것은 어디 와서 완성되는가? 그것은 전부 다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에서 완성된다.
우리는 지금 신약으로 온 것이다. 새 언약 안으로 왔다. 구약에 있었던 모든 것은 한 사람 안으로 통일되었다. 구약에 있었던 성전, 제사, 제물, 제사장, 왕, 선지자 등 이 모든 것은 전부 한 사람 예수 안으로 다 통일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은 예수님을 여러 면으로 쪼개 놓은 것이다. 의인화 시켜서, 물건화 시켜서, 성전이라는 모양으로, 선지자라는 방식으로 여러 가지로 갈라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참으로 안다면 구약을 전부 다 아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의 총체적인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신약 또는 기독교라고 말할 때, 그것은 엄격하게 말하면 구약에 있는 모든 것을 예수라는 한 사람으로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그러므로 예수로 해석되지 않는 구약은 우리에게 필요하지 않는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전혀 필요치 않다.
특히 레위기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종류는 크게 희생물(sacrifice)과 헌물(offering)로 구분되는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하는 것 중 대표적인 것이다. 희생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 드려지는 제물이고, 헌물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 드려지는 제물로 구속을 의미한다. 성경학도들이 쓰는 용어중에 '다른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라는 말이 있다. 대속과 구속은 죄 용서라는 측면에서 같은 개념이지만 내용적으로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대속은 법리적인 죄용서를 의미하고 구속은 유기적인 죄의 제거를 의미한다. 내가 교통법규를 어겨 자동차 사고가 나서 다쳤다고 하자, 그러면 교통법규를 어긴 것은 법리적 문제이고 다친 것은 유기적 문제이다. 아담도 마찬가지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범죄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법리적인 문제와 선악과를 먹고 몸에 유기적으로 죄가 들어왔다는 두가지 문제가 있는 것이다. 아담은 법리적으로도 죄 용서를 받아야 하고 유기적으로도 죄의 문제를 해결받아야 하는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은 희생물과 헌물로 오셔서 우리를 대속하시고 구속하신 것이다. 구속이란 위치를 이탈했던 인류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원래의 위치로 옮기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성경적 관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피조물의 위치 이탈이 죄라면 ,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피조물이 원래의 위치로 옮겨오면, 곧 구속이 되면 의로운 것이다. 즉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의 위치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헌물의 위치로 돌아오면 의롭게 되는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은 성격이 다르지만 공통점은 둘 다 죽음으로 드려진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는 두 가지 위치가 있다는 의미며, 단순히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서의 죽음 뿐 만아니라 하나님과의 연합을 위해서도 사람은 죄와 관계없이 헌물로서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데 희생물로서의 자격은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 만이 가능하고 우리에게는 해당이 없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죽는 희생물이 아닌 ‘살아있는 희생물’(롬 12:1), ‘영적인 희생물’(벧전 2:5)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은 우리 육체가 죽는 것은 희생물로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 ‘헌물’로 드려지는 것이다.(딤후 4:6)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의 대표다. 특히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하는 제물이 헌물이라는 의미는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의 위치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아담이 죄를 지어서 육체의 사망이 왔다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단순히 우리의 육체의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사람의 운명
하나님의 창조목적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영원한 생명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고 생명을 이식할 수밖에 없었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에게서 태어난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영원한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요 1:12-13)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 1:12-13)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
흙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연합되어야 한다. 그런데 영이신 하나님은 불 하나님이다.(히 12:29) 결국 불 하나님과 흙 사람이 연합되어야 하는 것이다. 영 이신 하나님이 소멸시키는 불(히 12:29) 이는 속성에서 화염검, 번제단, 십자가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따라서 피조물인 우리가 창조주이신 불 하나님과 연합되면 반드시 태워지게 되어 있다. 결국 피조물인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불 하나님께 태워지는 번제헌물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불이라는 속성에서 번제단(십자가)와 제물의 개념이 나온 것이다.
성경은 흙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얻기 위해 연합되는 과정을 불 하나님께 ‘삼켜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을 성경은 죽을 운명인 사람이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고 표현하고 있다.(고후 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이란 씨-생명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성경은 흙 사람과 영 하나님이 연합되는 과정을 하나님의 씨가 ‘심겨진다’(롬 6:5) 또는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다’(요 1:12-13)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어떤 씨를 심느냐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된다. 하나님의 씨를 심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를 심으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부활하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 24:15)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의 운명으로 창조됨
레위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나타내는 다섯 가지의 헌물(offering)로 ①번제헌물(the burnt offering), ②음식헌물(the meat offering), ③화평헌물(the peace offering), ④죄헌물(the sin offering) ⑤범법헌물(the trespass offering)이 등장한다. 헌물(offering)이란 말 그대로 사람이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의미다. 그런데 모든 헌물은 불에 태워진다. 그러므로 헌물의 총체는 번제헌물이다. 다른 네 가지 헌물들은 번제헌물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인생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대하여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불이기 때문에 흙 사람과 불 하나님을 만나면 자동적으로 우리는 태워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섯 종류의 헌물 중 음식헌물을 제외하고 네 종류의 헌물에는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sacrifice)이 포함된다. 희생물(Sacrifice)로 드려지는 어린양은 흠이 없어야 하듯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은 죄 없으신 예수님 한 분에게만 해당되고 죄인인 우리는 희생물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에게 죽는 희생물이 아닌 ‘살아 있는 희생물’(롬 12:1) 또는 ‘영적 희생물’(벧전 2:5)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죽는 것은 죄가 있기 때문에 희생물로서의 위치로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헌물로서의 위치로 죽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 헌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딤후 4:6)
특히, 레위기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다섯 가지 헌물 중 ‘음식헌물’은 죄와 관계없이 드려지는 제물이다. 이 의미는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 앞에 음식헌물의 위치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은 하나님의 음식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과정을 통해 사람은 영생을 얻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께 먹혀지는 과정을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고전 15:54) 또는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라고 하면서 우리가 헌물로서 죽는 것을 하나님께 음식으로서 ‘삼켜진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사람은 자가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라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마 4:4) 하셨는데 이는 사람이 육적으로는 빵을 먹어야 하고 영적인 생명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이와 같이 우리는 영생을 얻으려면 생명이신 예수님을 먹어야 한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사람의 아들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그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요 6:53-54)
우리 인생은 하나님 앞에 음식헌물의 위치로서 영생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우리가 삼켜져야 하고, 우리도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 먹고 먹히는 위치는 번제단, 곧 십자가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불이라는 개념에서 화염검, 번제단, 십자가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번제단인 동시에 십자가다. 십자가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 연합되어 우리는 영생을 얻는다. 그런데 거룩하신 하나님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 외에 다른 것과는 연합되지 않는다. 이에 따라 예수님은 사람으로서 세상에서 번제단으로 가셨고, 하나님으로서 지성소에서 나와 번제단으로 오신 것이다. 흙 사람은 번제단에서 영 하나님과 서로 연합되어 영생을 가진 새로운 창조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태워져야 할 운명임을 알 수 있다.
3.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의 두 가지 위치
레위기에서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종류가 크게 희생물(sacrifice)과 헌물(offering)로 구분된다는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희생물과 헌물이라는 두 가지 위치로 죽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소위 메시아 시편이라 알려진 시편22편에도 잘 나타나 있다. 시편22편은 총 31절로 구성되어 있는데 전반부(1-21절)는 그리스도의 희생물로서의 위치를, 후반부(22-31절)는 헌물의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시편22편 1절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도 ’아홉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은 곧,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라고 하셨다. 이는 예수님이 하나님 앞에서 아들의 위치가 아니라 피조물의 위치에 서신 것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육체로 계실 때 줄곧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셨다. 그런데 유일하게 여기서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가 아닌 ’하나님‘이라고 부르신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하는 것과 그냥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것과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큰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한다면 피조물인 우리는 하나님이 한 없이 두려운 존재가 되는 것이다.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가 되면 피조물은 창조주 앞에 심판의 대상이다. 예수님 당시에 유대인들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자 예수님을 향하여 신성모독 한다고 죽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에게 응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거니와 우리 법에 따라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하리니 이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었기 때문이니이다, 하니라.'(요 19:7)
그러므로 우리가 현재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는 권리는 거저된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얻어진 엄청난 특권인 것이다. 사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심을 통해 얻은 가장 큰 혜택은 우리가 하나님을 단순히 창조주로 알았던 세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격상시켰다는데 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먼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아니라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로 돌아가신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하기 위해서는 먼저 우리의 죄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친밀한 관계 속에서 아버지께 기도하였고, 하나님은 아버지로서 아들의 기도에 모두 응답하셨다. 특히 하나님은 친히 예수님을 향해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마 3:17) 라고 하셨던 분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시기 전날 마지막으로 죽음을 앞두고 아버지의 아들로서 기도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혼이 심히 슬퍼 죽을 지경이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멀리 가사 얼굴을 대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 26:38-39) 라고 기도하셨지만 응답했다는 기록이 없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죽음을 앞두고 아들로서 아버지께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나 아들이란 아버지의 얼굴이고,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게 아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은 육신이 죽는 것이 두려웠지만 그렇게 되면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응답이 없었다. 왜 아버지의 응답이 없었나? 예수님은 아들로서가 아니라 먼저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서, 곧 희생물의 위치로 드려져야 한다. 그래야만 인류의 죄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다. 죄 문제가 먼저 해결되어야 인류가 죄인의 위치에서 아들의 위치로 돌아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희생물의 위치가 먼저고 헌물의 위치가 나중이다. 이것이 아버지의 뜻이다.
물론 예수님 아버지의 뜻을 잘 알고 있었다. 이제 다음 날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게 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먼저 아들로서가 아니라 피조물, 곧 희생물의 위치로 먼저 하나님께 심판받아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께 대한 호칭도 '아버지'하면 안되고, 창조주를 뜻하는 '하나님'이라는 호칭을 사용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창조주 앞에서 피조물로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라고 절규하신 것이다. 또 한편으로는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전날 아들로서 아버지께 기도하였지만 응답이 없었기 때문에 사람이 죽는 순간에는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하듯이 할 수 있는 것은 다 해보아야 한다. 아들로서 안되면 피조물의 위치로 라도 기도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그런데 사복음서에 보면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 없다. 그런데 여기에 대한 기도 응답이 결국 히브리서에 나온다.
‘그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던 때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히 5:7)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시기 전날 죽음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아들로서 기도를 드렸지만 응답이 없자, 이제 십자가에서는 피조물의 위치로 돌아가 하나님께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자 하나님께서 결국 들으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은 결국 '창조주의 위치'에서 응답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시기 전날 아들로서 아버지께 기도하셨지만 응답이 없었고, 다음 날 피조물의 위치로 절규하시자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이다. 히브리서 5장 7절의 응답은 마 26:38-39, 마 27:46절의 기도에 대한 종합적인 응답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에 두고 두려움에 휩싸여 하나님께 기도하자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신 것이다. (히 5:7) 이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시고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신 것이다. 그리고 다시 피조물의 위치에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정상적 위치로 돌아오신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호칭도 '하나님이여'라는 호칭에서 '아버지여' 라고 하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는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시니라.’(눅 23:46)
예수님은 십자가 상에서 처음에는 ‘하나님이여’, 하다가 후반부에는 ‘아버지여’ 라고 하나님께 대한 호칭이 전환된다.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 헌물의 위치로 친밀한 관계로 돌아왔음을 의미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정상적 관계로 회복되었음을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은 결국 하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의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들으셨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인류의 죄 문제가 해결되었음을 의미한다. 죄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 앞에서 희생물의 위치는 창조주와 피조물이라는 법리적 위치지만 헌물의 위치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유기적 위치다.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유기적 위치가 되면 친밀한 교제의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 관계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죄가 있기 때문에 육체가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하는 아들로 태어나기 위해 헌물의 위치로 죽는 것이다.(딤후 4:6) 이와 같이 시편22편도 십자가 상의 예수님과 같이 전반부는 죄를 대속하는 고난받는 메시아를 표현하지만 시편22편 22절 부터는 하나님을 찬양하는 대반전 일어나는 것이다.
‘내가 주의 이름을 내 형제들에게 밝히 보이고 회중의 한가운데서 주를 찬양하리이다.’(시 22:22)
이러한 이유는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두 가지 위치를 나타내는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 상에서 ‘하나님이여’ 하다가 ‘아버지여로’ 라고 전환된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가 원래 정상적 위치로 전환되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희생물이라는 법리적 위치에서 헌물이라는 유기적 위치로 전환된 것이다.
우리 인생은 죄 이전에 근본적으로 하나님 앞에 유기적인 헌물의 위치로 창조되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상에서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눅 23:46) 라고 기도하신 의미는 번제헌물로 드려진다는 의미다. 우리 인생이 헌물로서 번제단(십자가)에서 불 하나님께 태워지면 재가 되어 없어지는 것임으로 영이 된다는 의미인데 이는 곧 번제헌물이 된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계획하신 창조 목적대로 번제헌물로 드려진다는 의미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번제헌물로 드려짐으로 영생을 얻게 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과 연합이 되려면 우리도 하나님과 같은 동질의 영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육신을 가진 인생은 반드시 하나님께 번제헌물로 드려져 영이 되어야 한다. 영과 영이 연합되는 것이지 영과 육은 연합될 수 없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의 죽음에 대해 헌물로 드려진다고 말한 것이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딤후 4:6)
4.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물과 헌물의 인격적 위치
마태, 마가, 누가 복음을 소위 공관복음이라고 한다. 마태복음은 왕으로 오신 예수님, 마가복음은 종으로 오신 예수님, 누가복음은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표현한다. 그리고 요한복음은 생명으로 오신 예수님을 표현한다. 예수님은 오셔서 전 인류의 죄를 포함하고 죽으셔야 한다.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려면 위로는 왕의 신분과 아래로는 종의 신분까지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 그래서 희생물을 나타내는 ‘대속물(ransom)’이란 단어는 공관복음에서 오직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표현되고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마 20:28)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막 10:25)
그리고 앞서 십자가 상에서 예수님이 ‘나의 하나님이여’ 라고 기도하신 것은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서 희생물의 위치라고 밝힌바 있다. 그래서 이 기도 또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아홉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은 곧,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막 15:34)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범죄했다는 의미는 법리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 죄도 있지만 선악과를 먹고 유기적으로도 육체가 죄라는 바이러스에 오염되었다는 의미도 있다. 앞서도 말했지만 우리가 자동차를 타고 가다 중앙선을 넘어 사고가 나서 다쳤다고 하자. 그러면 중앙선을 넘은 것은 법리적 문제이고 몸을 다친 것은 유기적 문제이다. 이 두 가지 문제가 모두 해결되어야 정상적 위치로 전환된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아담의 범죄의 법리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희생물'로서의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가복음에서는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유기적으로 아담을 치료하기 위해 '헌물'로 오신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다. 즉 온 인류를 구속하신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다. 즉 대속물은 희생물이란 의미고 구속은 헌물이란 의미이자 인간의 근원적 위치를 말하는 것이다. 죄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는 의미고, 구속이란 의미는 위치를 이탈했던 인류를 원 위치시켰다는 의미다. 대속과 구속은 죄 용서란 측면에서 공통점이 있지만 대속은 희생물로서 법리적 위치고, 구속은 헌물로서 유기적 위치다. 그래서 ‘구속(redemption)’이라는 용어는 사복음서 중에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사 구속하시고’(눅 1:68)
‘마침 그때에 그녀가 나아와 마찬가지로 주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에서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이 아이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8)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위를 보고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의 구속이 가까이 오고 있느니라, 하시니라.’(눅 1:28)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시라고 믿었노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요,’(눅 24:21)
그러므로 십자가 상에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은 희생물로서의 예수님을, 누가복음은 헌물로서의 예수님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 따라서 아담이 고침을 받으려면 원래의 위치로 옮겨와야 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이라는 무교병의 위치로 창조하였는데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누룩이 들어간 유교병이 된 것이다. 유교병의 위치에서 무교병의 위치로 옮겨온 것을 구속이라고 한다. 유교병이 무교병이 되려면 번제단에 태워져 재창조되어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위치로 돌아와야 한다. 이것을 구속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이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구속이 된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유기적인 관계인 헌물이 된다는 의미다. 대속은 법리적인 죄 용서를 의미하지만 구속은 유기적인 죄 용서를 의미한다. 아담이 무교병의 위치에서 누룩이 들어와 유교병의 위치로 전환된 것은 법리적인 죄 문제도 있지만 유기적으로도 죄인이 되었다는 의미다. 그래서 예수님은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요 8:44)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단순히 법리적으로도 죄 사함을 받아야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용하실 수 있는 무교병으로 전환되어 유기적으로도 죄 문제를 해결 받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구속을 통한 죄 용서는 유기적인 죄 용서를 말하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 1:14)
우리가 구속이 되려면 우리는 번제헌물로 드려져야 한다. 그래야만 위치를 이탈했던 사람이 하나님과 관계에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원래의 유기적 위치로 전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 구속의 위치가 바로 번제단, 십자가인 것이다.(골 1:14)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이라면 누가복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지키신 정상적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복음서이다. 아담은 원래 하나님께 드려질 번제헌물의 위치로 창조되었는데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무교병이라는 번제헌물의 위치를 이탈하여 유교병이 된 자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에게 씨를 뿌리고 싶어도 이미 다른 씨가 들어 있어 씨를 뿌릴 수 없는 위치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라고 마귀를 대신하여 조롱하는 모든 부류의 사람들의 유혹을 이겨내고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키신 분이다.
‘백성은 서서 지켜보는데 치리자들도 그들과 함께 그분을 비웃으며 이르되, 그가 남들을 구원하였으니 만일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 곧 그리스도이면 자기도 구원할 것이라, 하더라. 또 군사들도 그분을 조롱하면서 그분께 나아와 식초를 바치며 이르되, 네가 만일 유대인들의 왕이거든 네 자신을 구원하라, 하더라. 그분 위에는 그리스어와 라틴어와 히브리어로 이 사람은 유대인들의 왕이라 쓴 글도 있더라. 매달린 범죄자 중의 하나는 그분을 욕하며 이르되, 네가 만일 그리스도이거든 네 자신과 우리를 구원하라’(눅 23:35-39)
위 말씀을 보면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을 조롱한 사람들의 부류를 보면 ‘백성들과 치리자들’, ‘군사들’, 심지어 ‘범죄자‘ 마저도 예수님을 조롱하였다. 즉, 모든 부류의 사람들이 빠짐없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조롱한 것이다. 세상의 어떤 범죄자도 이렇게 조롱당하고 죽진 않을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조차 온 인류에게 철저하게 조롱당하시고 죽으신 것이다. 우리의 인간적 관점으로 보면 예수님은 얼마나 수치스러운가? 당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리면서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하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물위로 걸어가셨던 그 신과 같았던 사람이 모든 능력이 없어지고 옷이 벗겨진 채 십자가에 매달려 꼼짝 못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물론 예수님은 그 당시 당장 십자가에 내려와 그들을 심판하실 충분한 능력이 있었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잡는 자들은 다 칼로 망하리라.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장이라도 그분께서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게 주시도록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그리되면, 반드시 이렇게 되리라, 한 성경 기록들이 어떻게 성취되겠느냐? 하시더라.’(마 26:52-54)
그러나 만일 예수님이 수치를 견디지 못하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면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수포로 돌아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자신의 뜻 보다는 아버지의 뜻에 따른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해주신 번제헌물이라는 위치를 지키신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번제헌물로 드려지는 과정을 누가복음 23:46절에서 ‘내 영을 아버지께 맡기나이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임무를 완수하시자 ‘다 이루었다(it is finished)’(요 19:30) 하시고 머리를 숙이신 뒤 숨을 거두신 것이다. 예수님은 인류 가운데 아들로서 하나님께 드려진 첫 번째 번제헌물이셨다. 즉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사람농사의 과정을 첫 번째로 걸어가심으로 하나님의 사람농사의 첫 열매가 되신 분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예수님은 인류 가운데서 하나님 앞에 첫 번째 번제헌물로 드려짐으로 하나님의 사람농사의 첫 열매가 되셨다. 열매와 씨는 하나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 인류의 씨로서 조상이 되신 분이다. 우리 또한 예수님의 씨-생명을 이식받아 첫 열매 종류에 참여한 자들이 된 것이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 중의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 1:18)
5. 결 언
예수님의 인격의 대표적 위치는 희생물과 헌물이다. 희생물은 말 그대로 죄를 대속하기 위한 제물이고 헌물은 하나님과 교통을 위해 드려지는 제물로 구속을 의미한다. 희생물은 말그대로 누군가 나를 대신해서 희생했다는 대속의 의미로 법리적 죄 사함을를 의미하지만 헌물이란 내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른 위치에 있는 것임으로 유기적으로 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우리가 헌물로 드려지면, 곧 구속이 되면 의로운 것이다. 그런데 이 두 제물의 공통점은 하나님께 죽음으로 드려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에도 아브라함은 죽음을 상징하는 침례의 강을 두 번 건넜고,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에 땅에 들어가기 까지 홍해의 침례와 요르단의 침례가 있었다. 또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탈출하여 광야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예표하는 반석을 쳐서 반석이 갈라져 샘물을 마시는 기적도 두 번 있었다. 신약에 와서도 죄 없으신 예수님이 침례요한에게 요르단 강에서 침례를 받으셨다.(마 3:16)
이것은 우리 인생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헌물의 위치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것도 번제헌물의 위치로 창조된 것이다. 어차피 우리는 헌물로서 불 하나님과 연합되면 번제헌물이 되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무교병이라는 헌물의 위치를 이탈한 자라면 예수님은 죽기까지 무교병이라는 헌물의 위치를 지키신 분이다.
무교병은 말 그대로 볼품없다. 그래서 성경은 무교병이신 예수님을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 53:1) 라고 표현한다. 빵집에 가면 유교병들은 얼마 맛있고 아름답게 보이는가? 그래서 성경은 유교병을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창 3:6)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볼품없는 무교병이라는 헌물의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서 우리 인생의 위치를 찾아 주실 때까지 무교병이라는 인생이 얼마나 고귀한지 알지 못했다. 심지어 우리 자신을 원망하면서 유교병을 한 없이 부러워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이제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무교병의 인생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깨닫게 되었다. 볼품없고 연약한 무교병의 위치에 있는 우리 인생만이 우주 가운데서 유일하게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이다. 이제 예수님께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원래 위치로 옮겨주심으로 정 위치에 있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 즉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하게 된 것이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인격을 구속해 주심으로 우리의 인권을 회복시켜 주신 것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