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점
성경을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 할까?
1.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면에서 기록된 책이다.
성경은 하나님과의 관계적인 면에서 두 가지 노선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선악의 지식노선과 생명노선이다. 하나님과 관계에서 선악의 지식노선은 천사의 노선으로 종의 노선이고 생명노선은 아들의 노선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으로 창조하였고, 천사는 종의 운명으로 창조하였다. 우주 안에는 어디를 가던지 이 두 가지 노선이 존재한다. 회사에서도 사장과 종업원은 종의 노선이고 사장과 아들은 생명노선 안에 있다. 직장은 지식노선이라면 가정은 생명노선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하나님의 가족(엡2:19)을 목표로 창조하셨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노선 안에 있어야 정상이다.
2. 아담이 아들의 노선에서 이탈하여 종의 노선으로 감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의 나라를 목표로 우주를 창조하였다.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세자가될 운명이고, 천사는 정사들, 권능들로서(엡6:12)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신하가 될 운명으로 창조되었다.(히1:14) 그런데 아담이 아들로서 세자가 될 운명을 버리고 사탄의 유혹에 빠져 종의 노선으로 간 것이 인류의 문제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 이것을 죄라고 한다.
3. 사탄의 주 목적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의 영적전쟁의 목적은 간단하다. 사람을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부터 단절시켜 지식노선 안으로 이탈시키는 것이다. 생명노선에서 지식노선으로 이탈시키는 것이 사람에게는 사망이다. 사탄은 아담에게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신들과 같이 될 것이다라고 하면서 아담을 유혹하였다. 그러면 왜 아담은 선악과를 먹었을까? 사탄(천사)은 아담이 좋아는 모든 것을 소유하였다. 천사는 사람과 비교해서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고(마4:3), 하늘을 날 수 있으며(계 8:13), 육체적 죽음이 없다. 그러므로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것이다.(창3:6) 이 유혹으로 벗어 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4.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된 책이다.
가. 내가 무엇을 하여야 하리이까? vs 네가 어디 있느냐?
타락한 인류는 늘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까?’(막10:17, 눅18:16, 행16:30)하면서 종의 관점, 즉 행위 관점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 즉 선악의 지식(자기 의)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타락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창3:9)하시면서 사람의 존재적 위치를 묻고 계신다. 아들인 네가 어찌하여 종의 위치로 이탈하였느냐고 존재적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우리에게 만약 하나님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면서 행위를 물으셨다면 우리는 멸망이다. 그러나 타락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하면서 존재적 위치를 물으신 것이 우리에게는 희망이다.
나. 마태복음 1장에서 예수님의 조상들에 포함된 다섯 여자들.
마태복음 1장에는 예수님의 조상들에 포함된 다섯 여자들이 있다. 먼저 이들의 공통점은 선악의 지식의 관점, 즉 세상의 관점으로는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할 여인들이다. 먼저 유다의 며느리 다말이다. 다말은 자기 남편이 죽자 당시의 관례대로 남편의 동생 오난이 형을 대신해 다말의 남편으로 들어갔으나 오난도 죽었다. 당시 여자는 아들이 없으면 상속유업이 없었다. 아들이 있어야만 땅을 상속 받을 수 있었고 땅은 생명과도 같은 것이었다. 한마디로 아들이 없으면 당시의 여자들은 죽은 자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다말은 세상의 모든 비난을 무릅쓰고 살기 위해 창녀로 위장하여 시아버지 유다와 관계하여 아들을 얻었다.
여리고의 기생 라합은 자기민족을 배반하고 이스라엘 정탐군을 살려줌으로서 후에 이스라엘이 여리고성을 정벌하러 왔을 때 생명을 구할 수 있었다. 그후 살몬과 결혼하여 보아스를 낳았다.
룻은 모압의 이방여인으로서 유대인인 나오미의 며느리였다. 룻은 남편이 죽자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포기하고 시어머니 나오미를 따라 희망없는 유대땅으로 왔다. 그녀는 과부로서 소망없는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살기 위해 나오미의 친척인 보아스에게 접근해 아들을 얻음으로서 상속유업을 받았다.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는 왕인 다윗의 명령에 항거하지 못하고 살기위해 다윗에게 들어가 솔로몬을 낳았다. 마지막으로 마리아는 결혼하지 않은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낳았다.
이들 다섯 여자는 선악의 지식인 세상관점으로 보면 지탄받아 마땅할 여자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생명의 관점에서 쓰여진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도덕의 나라가 아니고 생명의 나라다. 그렇다고 도덕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관점이 틀린 나라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가정과 같은 곳이다. 만일 가정생활을 선악의 지식으로 판단하면서 살면 늘 불란만 일어날 것이다. 가정은 선악의 지식이 지배하는 곳이 아닌 생명이 지배하는 사회다.
다. 씨뿌리는 자의 비유(마13장)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씨뿌리는 자의 비유로 말씀하시고 있다.(마13:24-43) 씨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열매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볼 수 있는 형상으로 지어진 사람을 상징한다. 만물은 그래서 씨와 열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므로 만물안에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이 들어있다(롬1:20). 씨는 생명의 근원이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상징하고 열매란 하나님의 형상을 상징한다. 하나님은 씨와 열매, 곧 아버지와 아들나라를 목표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성경은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신 첫열매라고 말씀하신다(고전15:20) 첫 열매란 맏아들이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로마서 8장 29절에는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맏아들)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라고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처음 이 땅에 들어오실 때는 독생자이셨지만 부활 후에는 맏아들이라는 의미인데 이는 예수님께서 동생들이 많다는 의미다. 야고보서 1장 18은 “....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했다. 즉 우리는 예수님과 한 씨에서 태어낳다는 것이고 동생들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2장 11절에서도 “거룩히 구별하시는 분(예수님)과 거룩히 구별된 자들(구원받은 자)이 다 하나에서 났으니 이러한 까닭에 그분께서 그들을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워하지 아니하시고”했다. 예수님과 우리가 다 한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낳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농부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농사다(고전3:9).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짓고 계신다. 어떤 사람을 목표로 농사를 짓고 계시는가 하면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목표로 사람 농사를 짓고 계시며 이러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다.
라. 죄(罪), 의(義)
선악의 지식이 지배하는 세상과 생명이 지배하는 하나님 나라의 관점은 많이 다르다. 세상이 말하는 죄와 의와 하나님 나라에서의 죄와 의는 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점에서 보기 때문에 죄를 아들의 위치에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하며, 의란 하나님과 아들의 관계에서 바른 위치에 있는 것을 의라고 한다.
왜냐하면 사람을 아들의 위치로 창조하였는데 사람이 아들의 위치를 이탈하면 하나님의 원대한 창조 목적은 수포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당연히 의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이 아들의 위치에서 있는 것을 의(義)라고 한다.
요한복음 16:20절에서 “의에 대하여라함은 내가 내 아버지께로 가니 다시 나를 보지 못하기 때문이요,”했다. 의(義)란 아들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라는 것이다. 즉 아들로서 근원이신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의라는 것이다. 소위 세상의 성인들이란 사람들은 근원, 곧 아버지가 없다. 다 자기들 잘 난 맛에 살지 아버지가 누군지 모른다. 아들은 아버지로 인해 존재하고 아버지를 위해 존재한다. 아버지는 아들의 근원이고,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이다. 아버지 없는 아들은 없다. 그러므로 아들이 아버지께로 가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의(義)라고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기 3장 9절에서 타락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하시면서 사람의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5. 무엇을 하는 것이 아니고 아버지와 아들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요1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