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13. 세상의 상식과 기대 밖에 계신 분

올더스조에 2024. 3. 8. 21:49

세상의 상식과 기대 밖에 계신 분

 

 

1. 들어가는 말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롬 3:21)

 

불경과 성경 중 더 어렵고 심오한 것은 불경이지만 읽으면 이해가 간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어렵지도 않고 단순한 말씀 같은데 알쏭달쏭 하다. 이러한 이유는 불경은 세상의 관점에서 기록된 것이고 성경은 우리의 상식과 기대 밖에 있는 하나님의 왕국의 관점에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경은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의 판단 기준은 율법이라는 잣대를 가지고 선하냐, 악하냐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선하냐, 악하냐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세계가 아니고 생명의 왕국이다. 이것을 성경은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생명이신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고 생명의 세계인 하늘에 속한 분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을  세상에 속한 우리의 상식적 수준에서 알려고 하면 안 된다.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자에게서 태어난 자들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대언자가 없도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에서 가장 작은 자가 그보다 더 크니라, 하시니라.'(눅 7:28)

 

이것은 무슨 의미냐 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차원이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원숭이가 아무리 사람 흉내를 잘내고 총명하더라도 세상에 있는 말 못하는  어린아기보다 클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만이 들어가는 세계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큰 자라 하더라도 그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지 않았다면 그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가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분이라면 당시 유대인들은 땅에 속한 사람의 생명을 가진 자이기 때문에 그분을 이해할려고 노력해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분은 율법 밖, 곧 세상의 상식과 기대 밖에 계신 분이다. 

 

 

2. 하나님의 창조 목표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하나님의 왕국 건설에 있다. 그 왕국이란 그 생명을 가리킨다. 동물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동물의 생명을 가져야 하고, 식물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식물의 생명을 가져야 한다. 유일하게 하나님을 대치할 수 있는 용어는 생명이다. 하나님은 생명이고 생명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왕국이다. 이와 같이 우리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흙으로 지어진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어 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왕국 백성이 되게 하는 것이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목표, 곧 하나님의 의(義)에 이르려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3. 아담은 생명의 세계에서 율법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함

 

아담은 본디 하나남의 아들로 창조되었다.(눅 3:38)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생명의 관계 하에 있었던 것이다. 물론 아담은 위치적으로는 창조된 하나님의 아들이었으나 유기적인 하나님의 아들은 아니었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유기적인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야 할 운명이었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이를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된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하였다.(창 3:4-5) 이러한 아담의 범법으로 말미암아 세상에 율법이 들어왔다.(갈 3:19) 이때부터 세상은 율법이라는 질서 하에서 선하냐, 악하냐의 기준이 세상의 상식이 된 것이다.

 

 

4.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義, Righteousness)

 

세상의 일반적 상식 수준에서 의는 율법적인 잣대로 선하냐 악하냐의 기준으로 판단한다. 선하면 의롭고 악하면 불의하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선악의 기준을 가지고 판단하는 세계가 아니고 생명의 세계다. 행위로 만들어지는 세계가 아니고 출생을 통해 들어가는 세계다. 결국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야만 하나남의 의(義)에 이를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세상은 아담의 범죄 이래 율법의 질서 하에서 선과 악의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세계가 되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생명의 세계다.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는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다. 물론 율법은 이론적으로 너무 좋고 완벽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지 않는다. 그러나 율법은 글자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 곧 생명을 줄 수가 없다. 줄기세포 논문이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단지 이론이기 때문에 생명을 줄 수 없는 거와 같다.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생명을 줄 수 없는 율법의 결정적 단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있었으리라.’(갈 3:21)

 

위 말씀에서 바울은 만일 율법이 생명을 줄 수 있었다면 율법을 통해 하나님의 의를 달성할 수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율법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결정적 단점은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었다고 말한다. 그래서 인류가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면 세상의 질서인 율법으로는 안 되고 율법 밖에 있는 다른 의가 와야 하는데 이분이 바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의가 드러났느니라.’(롬 3:21)

 

 

5. 세상의 상식과 기대 밖에 계신 분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란 우리의 일반적 상식과 기대 밖에 있는 것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그 당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었다. 만일 단 한 사람이라도 예수님을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예수님의 구속은 필요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구속이란 어떤 기준으로 돌아간다 의미이기 때문에 그 사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구속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롬 3:10) 라는 말이 맞는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 당시 베드로가 예수님을 향하여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라고 말하지 않았느냐 라고 말이다. 물론 베드로는 그렇게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베드로를 통해 하나님께서 그렇게 배열해 놓은 것이지 실제로 베드로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안 것은 아니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실제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받아드린 것은 예수님의 부활 이후이다. 예수님이 십자가로 잡혀 가시자 베드로를 포함하여 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예수님을 버리고 떠나 갔었다.

 

왜냐하면 그 당시 유대인들이 기대하던 메시아는 유대인의 왕으로 오실 정치적 메시아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의 기대와 달리 힘없이 십자가로 가시자 그들의 기대와 소망도 함께 무너지고 모두 떠나간 것이다. 베드로가 당시에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인식하고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아니하리이다’(마 26:35) 라는 말은 빈 말이 아니었다. 지금도 정치적 동지를 위해 죽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베드로가 예수님이 잡혀가시자 주님을 모른다고 세 번 부인한 것은 두려워서가 아니라 진짜로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다. 제자들의 입장에서 구약의 예언에도 메시아는 이방인들의 압제로 부터 자신들을 구원할 유대인의 왕으로 오실 정치적 메시아로 기록되어 있었고,  또한  예수님의 바람과 바다를 잠잠하게 하고 죽은 자를 살리신  능력이라면 예수님은 자신을 체포하러 온 자들에게 불 벼락을 내려 심판을 시원하게 하고 당당히 유대인의 왕으로 등극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특히, 베드로가 당시에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자들 중 하나인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칼로 귀를 베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잡는 자들은 다 칼로 망하리라.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장이라도 그분께서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게 주시도록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마 26:52-53)

 

위 말씀을 보건데 예수님은 충분히 예수님을 체포하러 온 자들을 응징하실 수 있었다. 아마도 이런 말씀을 하실 때까지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바로 하늘에서 불을 내려 저들을 심판하실 거라고 내심 기대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예수님이 지금까지 보여주셨던 모든 능력을 잃어버리고 힘없이 십자가에 매달리자 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 없이 모두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갈길로 돌아간 것이다. 베드로의 대답과 같이 그들은 예수님을 도저히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고 부활하기 전까지는 예수님을 향해 단지 ‘사람만은 참 좋은 사람이었데’ 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이 진짜로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았다면 예수님을 버리고 자기 길로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의 상식과 기대 밖에 계신 분이었다.

 

예수님과 비교해 당시 세상 사람들은 다른 생명을 가지고 있었다.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분이라면 우리는 땅에 속한 사람들이었다.(고전 15:47)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일반적 상식으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유대인들은 당시 율법의 질서 하에 있었고 예수님은 생명의 질서 하에 있었다. 그런데 율법은 단지 돌 판에 기록된 글자이기 때문에 글자대로 하면 누구든지 율법을 통과할 수 없기 때문에 성경은 율법을 죽이는 사역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 3:6)

 

사실 성경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책으로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한 책이다. 그럼에도 율법에 의하면 안식일을 어긴 자는 죽이라고 되어 있다 보니 글자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글자대로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책이 사람을 죽이는 책이 된 것이다. 그래서 글자의 사역은 죽이는 사역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안식일의 영적 의미는 창조물은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고 ‘보시기에 좋다’라고 하시면서 창조  후 안식하셨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된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 이로 인해 하나님의 안식이 깨진 것이다.(이 블로그 ‘하나님의 안식을 회복하신’ 분 참조)

 

안식일의 영적 의미는 창조물은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고 그 격을 지켜야 한다는 의미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안정이 오기 때문이다.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품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은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고 결과적으로 창조주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는 항상 같이 따라 다니며 똑같이 죄 값은 사형인 것이다. 아담의 법리적 죄명은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였고, 예수님은 유대종교 법정에서 아담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죄로 십자가형을 당하신 것이다.

 

당시 유대인들은 율법이라는 질서 하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종의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영적인 깊은 마음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생명의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성경을 표면적으로 보지 않고 글자 뒤에 있는 아버지의 뜻을 보았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글자의 사역을 했다면 예수님은 영의 사역을 하신 것이다.(고후 3:6)

 

그러나 글자의 사역을 하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자 그들은 분을 참지 못하고 사형에 처하였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자 율법의 질서 하에서 하나님께서 대하여 종의 근성을 가지고  있던 유대인들의 개념 속에는 사람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신성모독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유대인들이 이런 이유로 더욱더 그분을 죽이려 하니라.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더라.’(요5:18)

 

'유대인들이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 하는 것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요 신성모독 때문이니 곧 사람인 네가 네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기 때문이니라,' (요 10:33)

 

'유대인들이 그에게 응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거니와 우리 법에 따라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하리니 이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었기 때문이니이다, 하니라.'(요 19:7)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종교법정에서 안식일을 범한 죄와 신성모독 죄로 처형당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용서하는 등 그 당시 유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파격적인 행동을 하셨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율법은 조선시대의 유교이념과 지금 북한의 주체사상과 같은 질서였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셔서 기존 질서인 율법을 따르지 않고 생명의 질서를 따랐던 것이다. 그런데 율법의 질서 하에 있던 유대인들은 글자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표면적인 글자의 사역을 했기 때문에 죽이는 사역을 하게 된 것이다. 유대인들의 글자의 사역의 끝판 왕이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마저도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죄 없으신 예수님마저도 율법의 심판을 받고 죽게 되자 더 이상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게 된 것이다. 이로 인해 하나님은 율법을 폐하시게 된 것이다.(히 7:18)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율법의 질서가 끝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향하여 ‘율법의 끝마침’ 되셨다고 하는 것이다.(롬 10:4)

 

이렇듯 예수님은 우리의 상식과 기대 밖에 계신 분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이야기이지 세상 이야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교회에서는 예수님에 관해 이야기 할 때 세상과 결부시켜 이야기하곤 한다. 예수님은 세상에 속한 분이 아니고 하늘에 속한 분이다. 그분은 우리의 상식과 기대와는 다른 질서 하에 계신 분이다.

 

‘첫째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고전 15:47)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족보에는 예수님의 조상에 속한 다섯 여자들이 나온다. 본디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서 여기에 나오는 다섯 명의 여자들은 모두 인류를 대표한다. 이 다섯 명의 여자들은 우리의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도덕적으로 비난 받아 마땅할 대상들이다. 그러나 성경은 이들을 책망하는 말이 없다. 이들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서 생명의 노선을 걸어간 여자들로서 인류를 대표한다.

 

혹여 우리가 생명의 노선을 걸어야 한다고 하니 도덕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어둠이 있어야 빛이 발하듯이 세상은 율법의 세계에 있지만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이 세계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기 위해 하나님께서 섭리적으로 배열한 책이 성경인 것이다.

 

예수님은 오셔서 생명의 노선을 걸어가신 분이다. 한 때 우리도 땅에 속함으로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자로서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고 예수님과 같은 생각, 같은 마음을 가지고 생명의 질서 하에서 하나님과 동역하는 자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