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
9.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성경은 예수님을 향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라고 한다.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말씀은 하나님이셨더라’ 라고 밝히고 있으므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셨다는 의미다. 이에 대해 바울은 논쟁의 여지가 없다고 단호하게 말하고 있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딤전 3:16)
1. 성경이 말하는 ‘말씀’에 대한 정의
- 말씀은 하나님이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 1:1)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는 다르다.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는 창조를 시작한 시간이 있었지만 요한복음 1장 1절의 ‘태초’는 하나님 자신의 존재를 의미하기 때문에 시간이 없는 영원 과거를 의미한다.
요한복음 1장 1절은 ‘태초에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다’라고 단순하게 말한다. 이는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리스도의 신성의 절대성과 영원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그리스도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계시지 않았고, 태초에 하나님이 아니셨으며, 단지 어느 특정한 시기에 하나님이 되어 하나님과 함께 있게 된 것이다’라는 주장을 부정한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에서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 이 세분이 하나라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표현하면서 다시 한번 말씀이 하나님이심을 증거한다.
‘이는 하늘에 증거하시는 세 분이 계시기 때문이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한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요일5:7)
- 말씀은 하나님의 정의이자, 표현이다.
‘말씀이 하나님이시다’라는 의미를 좀 더 쉽게 설명해 보자. ‘하나님은 영이시다’라는 의미는 하나님은 공기와 같은 분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을 볼 수 없다는 의미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고 가만히 계신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가 없고 그분은 비밀하신 분으로 남는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말씀으로 자신을 정의하시고 표현하신다. 하나님은 ‘말씀하시는 하나님’이시며, 말씀은 영이신 하나님의 정의이자 표현이다.
- 만물의 근원은 말씀이다.
탈레스는 만물의 근원은 물, 헤라클레이토스는 불, 아낙시메네스는 공기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물과 불과 공기를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은 몰랐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온 우주를 만들었고 말씀이신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졌다.
‘바로 그분께서 처음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모든 것이 그분에 의해 만들어졌으니 만들어진 것 중에 그분 없이 만들어진 것은 하나도 없었더라.(요 1:2-3)
그러므로 생명의 근원이 하나님이시듯이 만물의 근원은 말씀이다. 예를 들어 내가 자동차를 만들고자 한다면 자동차를 만들고자 하는 말씀이 먼저 있어야 하듯이 모든 만물의 근원은 말씀이다. 말씀이 먼저 있고 형상이 나중에 있는 것이다.
- 말씀은 생명과 성령과 동일체다.
영이신 하나님은 생명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생명이신 하나님의 표현, 곧 생명의 표현이다. 좀 더 쉽게 표현하면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다. 그런데 말씀은 우리가 들을 수 있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무슨 신기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오는 것이 아니라 말씀이라는 수단을 통해서 오시는 것이다.
돌부처가 생명이 없다는 것은 그 안에 영이 없어서 말을 할 수 없다는데 있다. 우리 사람도 우리의 생명이 우리 안에 있지만 볼 수가 없다. 영이 없는 몸은 죽은 거와 같이 영이 내 안에 있기 때문에 나는 살아 있는 것이고 이 영을 통해 나는 생각을 하고 말을 한다. 내가 하는 말도 내 생명의 표현이다. 그래서 항상 무슨 일을 하든지 말씀이 먼저 있고 형상이 나중이다. 내가 무엇을 손으로 잡으려 한다면 잡고자하는 말씀(영)이 먼저고 그 다음 행동으로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의 근원은 말씀, 곧 영이신 하나님인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은 말씀을 통해 일하시고 말씀을 통해 우리게 다가오시는 것이다. 그래서 영과 말씀은 동일체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 되는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요 6:63)
결국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 삼위일체라고 하였듯이 말씀과 생명과 성령은 동일체인 것이다.
‘이는 하늘에 증거하시는 세 분이 계시기 때문이니 곧 아버지와 말씀과 성령님이시라. 또한 이 세 분은 하나이시니라.’(요일5:7).
2. 왜 말씀, 곧 하나님은 사람으로 오셔야만 했는가?
- 하나님은 거처가 필요함
사람은 처음부터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창조되었지 생명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롬 9:24)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그릇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이는 사람이 성전이 되는 것으로 사람이 하나님의 거처가 된다는 의미다. 다른 말로 하면 영은 몸을 필요로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이 사람 안에 들어오면 사람은 하나님의 '완전한 형상'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 와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를 성경은 '완전한 자'로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완전한 자들은 다 이같이 생각할지니 만일 어떤 일에서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너희에게 드러내시리라.’(빌 3:15)
구약의 성전 안에는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돌판에 기록된 십계명이 궤안 있었다. 여기서 십계명은 하나님을 예표하는 말씀이고 궤는 사람의 몸을 예표한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몸이 필요한 것이다.
- 사람에게는 사람으로 말을 해야 함.
하나님은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계시해 줄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구약시대에는 하나님께서 불기둥과 구름기둥 등, 여러가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였고, 또한 대언자들을 통해서 하나님 자신을 사람들에게 계시하셨지만 이것은 완전한 것이 못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을 완전하게 사람들에게 계시하기 위한 대책이 필요하였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직접 사람으로 오시는 것이다. 사람에게는 동질의 사람이 와야 이해가 잘 되기 때문이다. 이것을 성경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말씀하셨으며’라고 표현하는 것이다.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분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히 1:-2)
특히, 구약시대에는 대언자들을 통해서 말씀하셨는데 이것은 어떤 여인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다고 가정할 때 애인의 편지를 단순히 집배원을 통해 전달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나 신약시대에 와서는 하나님께서, 즉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셨는데 이것을 히브리서 1장 2절에서는 ‘이 마지막 날들에는 아들을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애인이 직접 사랑하는 여인을 찾아 온 것과 같은 개념이다. 서로 사랑하는 사람이 직접 만나는 것 보다 더 좋은 방법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말씀 육신되어’ 오셨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직접 육신을 입고 오신 것으로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최종 대책’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아들보다 더 나은 대책은 없는 것이다.
사실 말씀과 아들은 동일한 개념을 가지고 있다. 말씀이 영이신 하나님의 표현이듯이 아들이란 우리말에 아버지의 얼굴이란 속담이 있듯이 아들이란 아버지의 표현이자 형상인 것이다. 씨의 소망은 열매이듯이 아버지의 소망은 아들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소망은 아들이며,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들이 가득차서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해지는 것이다.
아들이 오시기 전에는 우리는 제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수도 없었고 볼 수도 없었고 만질 수도 없었는데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 이 땅에 옴으로서 우리가 이제는 들었고, 보았으며, 만졌다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부터 계셨던 그것 즉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그것을 우리가 들었고 우리 눈으로 보았으며 자세히 살펴보았고 우리 손으로 만졌노라. 그 생명이 나타나시매 우리가 그것을 보았고 또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나신 그 영원한 생명을 증언하며 너희에게 보이노라'.(요일 1:1-2)
- 인류가 하나님의 아들을 영접할 만큼 충만한 때가 이름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목적을 우리의 죄 문제에 한정해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큰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위해 오셨다는 것이다. 사람이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그릇으로 창조되었다는 의미는 아담은 생명이 없는 모형이라는 의미다.(롬 5:14) 그래서 아담은 설령 범죄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망이 군림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법과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롬 5:14)
따라서 사람은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야 할 존재였다. 그것도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창세 전에 정해져 있었다.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
그러면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신 생명을 가진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보다 먼저 오시면 되지 않았겠는가? 라고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씨는 땅이 필요하듯이 생명은 그릇이 있어야 담겨진다. 곧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시려면 그릇으로 창조된 사람이 먼저 있어야 하는 것이다. 곧 거처가 먼저 있어야 오실 수 있는 것이다. 거할 곳이 없는데 하나님이 어떻게 이 땅에 오시겠는가? 물론 하나님은 무소부재 하시기 때문에 영으로는 어디든지 계신다. 그러나 그러한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으며 우리에게는 하늘에 계신 하나님과 동일한 것이다.
설령 창조 당시에 예수님이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다 하더라도 영원한 생명은 육신적의 혈통에 의해 태어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요 1:12-13) 그런데 창조 당시에는 세상에는 사람도 없는데 예수님이 사람들을 위해 죽을 수 없었으며, 설령 사람들이 있다 하더라도 인류가 이 땅에 출현한지 얼마 되지 않아 어리기 때문에 하나님께 대한 지식이 없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바로 오시지 않고 4천년 동안 인류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여러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을 계시하고 가르치신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아이일 때에는 하나님을 알아가기 위해서 세상의 초등원리인 율법이라는 가정교사가 필요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제 내가 말하노니 상속자가 모든 것의 주인이나 아이일 때에는 전혀 종과 다르지 아니하고 아버지가 정한 때까지 가정교사들과 감독하는 자들 밑에 있느니라. 이와 같이 우리도 아이였을 때에는 세상의 초등 원리 밑에서 속박 당하였느니라.’(갈 4:1-3)
그러나 이제 '충만한 때'가 이르러 인류가 하나님의 상속자가 될 만큼 장성하게 되자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신 것이다.
‘그러나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있게 하셨나니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려 하심이라’(갈 4:4-5)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고 4천년이 지나자 드디어 자신의 아들이 이 땅에 오실 충만한 때, 곧 인류가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드릴 모든 필요 충분 조건이 다 갖추어졌다고 보신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충만한 때가 이르매 하나님께서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하나님의 창조목표인 사람에게 생명-씨를 주려면 하나님이 사람으로 와야 함.
하나님의 경륜의 법칙은 하나님 자신이 씨이기 때문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사람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천사로 와도 안되고 다른 어떤 피조물의 모습으로 와도 안 되고 오직 사람으로 오셔야한다. 사람의 조상은 사람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오이씨를 심으로 오이가 나고 호박씨를 심으로 호박이 나듯이 하나님은 반드시 사람으로 오셔서 씨를 뿌리고 새로운 인류의 조상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원리는 밀 농사의 원리와 같다. 밀은 전년도 가을에 파종하여 흙 속에 들어가 죽은 다음 겨울을 지나 초여름에 열매를 맺고 수확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류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반드시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남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또 다른 비유를 한다면 아담은 모형으로서 무정란이라면 예수님은 씨가 있는 유정란으로 오신 것이다. 우리는 무정란에서 유정란으로 전환되어야만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고 유정란으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창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씨’라고 말씀하였고, 아브라함에게도 무정란인 인류에게 유정란이 될 수 있도록 씨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이 씨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그리스도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 3:16)
‘말씀이 육신되었다’는 의미는 하나님이 사람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사람으로 와서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씨가 되기 위해서는 한 알이 밀이 떨어져 죽어야 하듯이 반드시 죽고 다시 살아서 부활의 열매가 되어야 한다.(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예수님은 저절로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 아니고 죽으시고 부활의 열매가 되심으로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열매와 씨는 하나다. 예수님이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씨’가 되신 것은 부활 이후이다. 예수님이 육체로 계실 때 이름은 예수이고 부활 이후에 ‘씨’라는 의미인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 45절에서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 고 말하는데 이 의미는 그리스도가 인류에게 생명을 주는 ‘씨’가 되셨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 곧 씨를 주시는 것이다. 흙 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이다.(요 1:12-13)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은 하늘과 땅의 차이 보다 큰 이질적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저 하늘에 앉아서 직접 사람에게 씨를 주실 수 없고 반드시 하나님께서 사람으로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사심을 통해 사람과 연합될 수 있는 ‘씨’로의 육종사업 과정을 거쳐야 한다. 예수님이 중재자가 된 것은 저절로 된 것이 아니고 사람으로 오셔서 죽으시고 다시 사심을 통한 과정을 거치심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할 수 있는 중재자가 되신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 2:5)
하나님께서 저 하늘에 앉아서 바로 사람에게 씨를 주실 수 있다면 왜 주시지 않았겠는가? 말씀이 육신, 곧 하나님께서 육체로 이 땅에 오셔야만 하는 필연적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인데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시지 않았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가 없고 우리 또한 하나님의 아들들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 되신 분이라는 의미는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태어났다(마 1:20)라는 의미인 동시에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서 나타나셨다는 의미다.(딤전 3:16) 이에 대해 바울은 디모데전서 3장 16절에서 ‘논쟁의 여지가 없다’ 라고 증언하고 있다.
‘논쟁의 여지가 없이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성령 안에서 의롭게 되시고 천사들에게 보이시고 이방인들에게 선포되시고 세상에서 믿기시고 영광 속으로 올려져서 영접을 받으셨느니라.’(딤전 3:16)
사도 요한 당시에도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었다. 소위 영지주의자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예수님이 육체로 오시지 않고 단지 영으로 오셨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을 반박하기 위해 요한은 ‘그러나 군사들 중의 하나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찌르니 즉시로 거기서 피와 물이 나오더라.’(요 19:34) 라고 말하면서 예수님이 육체로 오셨다가 죽었음을 증언하고 있다. 육체는 피와 물이 있지만 영은 없기 때문이다.
특히,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자들을 향해 적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이 적그리스도의 그 영이니라. 그것에 관하여는 그것이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그것이 지금 이미 세상에 있느니라.’(요일 4:3)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들어왔는데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런 자가 속이는 자요 적그리스도니라.’(요이 1:7)
영이신 하나님은 몸을 필요로 하기에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몸을 가진 사람에게 있다. 그래서 예수님은 반드시 육체를 가진 사람으로만 와야 하는 것이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광야에서 신 마귀와 전쟁에서 사람의 위치를 가지고 승리하셨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몸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셔야 하는 것이고 이것을 부인하면 적그리스도가 되는 것이다.
성전 안에서 하나님을 예표하는 계명도 궤 안에 있었다. 하나님은 궤짝이 필요한데 이상하게도 우리는 궤짝을 벗어 버리고 공중으로 날아가고 싶어 한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가 현재 신음하고 있는 것은 몸을 벗기 위해 있는 것이 아니고 새로운 몸을 입기 위한 과정이라고 말한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영이신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신이 거할 집으로 사람을 필요로 하신다. 장차 하나님의 경륜이 완성이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한 몸, 한 마음이 된다.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계 22:17)
위 말씀을 보면 성령과 신부가 따로 따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성령과 신부가 하나가 되어 말씀하고 있다. 이것이 진정한 연합, 진정한 결혼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완성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