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율법의 끝마침이 되신 분
6. 율법의 끝마침이 되신 분
‘그리스도께서는 믿는 모든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하여 율법의 끝마침이 되시느니라.’(롬 10:4)
성경은 예수님을 향하여 ‘율법의 끝마침’이라고 말한다. 앞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라는 사실을 살펴보았다. 마지막 아담이란 아담을 유기적으로 끝냈다는 의미다. 반면에 ‘율법의 끝마침’이라는 말은 당시에 유대인들의 통치체제인 율법이라는 법리적 질서를 끝냈다는 의미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법리적 질서는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전 인류에게 적용되는 질서였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유대인들에게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창조 시에 사람의 마음판에 양심이라는 법을 새겨주었기 때문이다. 율법과 양심의 법의 차이라면 율법은 눈에 보이는 명시적 법이라면 양심의 법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율법을 소유하지 않은 이방인들이 본성을 통해 율법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행할 때에 이런 사람들은 율법을 소유하지 않아도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사람들은 또한 자기 양심이 증언하며 자기 생각들이 서로 고소하고 변명하는 가운데 자기 마음속에 기록된 율법의 행위를 보이느니라.’
그래서 성경은 율법을 언급할 때 단지 유대인들에게만 적용되는 법으로 언급하지 않고 온 세상에 적용되는 법으로 말하고 있다. (롬 3:19, 롬 10:4)
1. 사람의 창조목적과 사람의 운명
흙 사람은 근원적으로 죄가 없더라도 그리스도를 통해 씨 생명을 이식받아 영원한 생명으로 거듭나도록 운명 지어졌다. 예수 생명의 씨를 심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마귀 사망의 씨를 심으로 불의한 자의부활로 부활하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행 24:15)
흙 사람의 운명은 어떤 씨를 심느냐에 따라 그 열매가 결정된다. 우리는 통상 죄 문제만을 언급하지만 죄 용서는 법리적 문제이고 영생은 유기적 문제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죄 용서가 최종목적이 아니고 생명을 주기 위해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는 두 가지 위치가 있는 것이다. 레위기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예표하는 제물이 크게 희생물과 헌물 두 종류가 있다. 이는 십자가에서 죄 용서를 위한 희생물의 위치와 영생을 얻기 위한 헌물의 위치를 표현는 것이다. 그런데 두 제물 모두 죽음으로 드려진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서도 죽음이 필요하지만 생명을 주기 위해서도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흙 사람은 근원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생을 얻어야 할 운명이다. 원래 죄의 근원적 의미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하다’라는 의미다. 그래서 설령 내가 아담과 같은 죄가 없다 하더라도 그리스도를 믿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하기 때문에 죄가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요 16:9)
또한 흙 사람이 영생을 얻으려면 단순히 육체로 계신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 자신이 영인데 영이란 불이라는 의미다. 흙 사람은 불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변화를 받고 영생을 얻기 때문이다. 하나님 자신이 불이라는 개념에서 구약의 번제단이 나왔고 신약의 십자가가 나온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용광로 하나님이라 할 수 있다. 만물은 용광로 안에서 태워져 재창조된다. 사람과 나무의자가 있다면 현재 상태로는 서로 연합될 수 없다. 그러나 둘 다 용광로 안에 들어가면 재로 변하여 재창조될 수 있는 거와 같은 원리다. 흙 사람도 용광로 하나님께 태워져 보석과 같은 영원히 변치 않는 부활의 몸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도 필요하지만 죄 이전에 영생을 주기위해 창세전에 계획이 되어 있었다고 말한다.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정하신 것이라.’(고전 2:7)
위 말씀에서 하나님의 지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의미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우리의 죄에 대한 대속이라는 개념 안에 고정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에는 등한시 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죄에 대한 심판과 생명이라는 두 가지 위치가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이라는 위치와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이라는 두 가지 위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설령 죄가 없더라도 영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2. 율법이 주어진 배경
율법은 표면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아담의 범죄로 인하여 더해진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약속을 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 범법들로 인해 더해진 것이요, 한 중재자의 손에서 천사들에 의해 정해진 것이라.’(갈 3:19)
특히 율법의 유효기간은 ‘약속을 받은 그 씨가 오실 때까지’로 한정하고 있고, 원래는 없어야 되는 것인데 ‘범법들로 인하여 더해진 것’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것인데 율법은 줄기세포 논문과 같이 글자이기 때문에 이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는데 있다. 그래서 율법의 결정적 단점이 있다면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있었으리라.’(갈 3:21)
줄기세포 논문이 이론적으로 아무리 완벽하더라도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는 거와 같은 이치다.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지 행위를 통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요 1:12-12)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안에서 원래는 없는 것인데 약속의 씨이신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잠시 더해 진 것이다.
3. 율법을 주신 목적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생명을 줄 수 없는 율법을 인류에게 주셨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흙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인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십자가 안에서 그리스도와 연합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여하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불러 모아야 한다. 그런데 사람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오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자신을 동일시하는 감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이 죄가 없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와 동일시하는 감정이 일어날까? 그렇지 않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기 위해서 율법을 주셨다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알거니와 율법이 어떤 것들을 말하든지 그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에게 말하나니 이것은 모든 입을 막아 온 세상이 하나님 앞에서 유죄가 되게 하려 함이니라.’(롬 3:19)
율법을 통해 모든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었지만 역설적으로 이 율법이 사람들에게 절망감을 안겨주어 이 율법으로부터 자신을 구출할 구원자를 찾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율법이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훈육선생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 3:24)
낚시꾼이 낚시를 할 때 떡밥으로는 고기를 낚을 수 없지만 낚시 바늘 앞으로 고기를 유인하는 역할을 하듯이 율법 자체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지만 이 율법을 통해 사람 낚는 어부이신 그리스도 앞으로 유인하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율법으로 사람에게 생명을 주려는 것이 아니고 생명을 주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유인하기 위해 주신 것이다.
3.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목적 달성을 위해 율법의 질서를 끝내고 새로운 질서로의 전환이 요구됨
지금까지 살펴보았지만 율법의 가장 큰 문제점은 이론적으로는 완벽하지만 결정적으로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데 있다.(갈 3:21)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경륜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흙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새로운 대책을 강구해야만 하셨다. 즉 율법이라는 무기적 질서에서 생명을 줄 수 있는 유기적 질서로의 전환이 요구된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도 율법의 질서를 끝내려면 이 질서의 무익성이 증명되어야 한다. 율법은 지금까지 하나님께서 인류에 대한 통치체제 였기 때문이다. 제3공화국에서 제4공화국으로 체제를 전환하려면 제3공화국의 헌법의 무익성이 증명되어야하고, 이에 대한 국민의 합당한 동의를 거쳐야 하는 것이다. 특히 율법은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주신 헌법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도 율법의 질서를 끝내고 새로운 질서로 전환하려면 이에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사람들은 율법을 통해 의를 이루려고 끊임없이 노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인류와 하나님께 공통적으로 증명되어야 한다.
4. 예수님이 ‘율법의 끝마침’이 되심으로 새로운 질서로의 전환을 위한 합당한 명분을 제공함
드디어 인류 유사이래 1등 인간인 예수님이 출현하였다. 만일 예수님이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지 않는다면 인류는 율법으로도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율법을 통과하지 못한다면 2등 이하 모든 인간은 율법으로는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는 것이다. 세상에서 수영을 가장 잘하는 사람이 부산항에서 미국까지 수영을 통해 건널 수 없다면 전 인류는 수영을 통해 태평양을 건널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예수님은 이제 모든 인류를 대표하여 율법 앞에 서신 것이다. 그런데 결과는 어떻게 되었나, 예수님은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로 십자가형을 선고 받고 죽으셨다.
‘유대인들이 이런 이유로 더욱더 그분을 죽이려 하니라. 이는 그분께서 안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더라.’(요5:18)
'유대인들이 그분께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가 너를 돌로 치려 하는 것은 선한 일 때문이 아니요 신성모독 때문이니 곧 사람인 네가 네 자신을 하나님으로 만들기 때문이니라,' (요 10:33)
'유대인들이 그에게 응답하되, 우리에게 법이 있거니와 우리 법에 따라 그는 마땅히 죽어야 하리니 이는 그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들었기 때문이니이다, 하니라.'(요 19:7)
이제 인류 유사이래 1등 인간인 예수님이 율법을 통과하지 못함으로서 모든 사람은 율법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율법 아래서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롬 3:20)
그래서 하나님은 율법 밖에서, 곧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의를 이룰 수 있는 대책을 강구하게 된 것이다.(롬 3:21)
사실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는 아담이 먼저 범한 것이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매우 좋다고 하시면서 안식하셨다.(창 1:31~ 창2:2) 그러나 아담은 신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창 3:5~6)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죄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제기한 것임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 된다. 그래서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는 같이 붙어 다니며 둘 다 죄값으로 사형이다.(출 35:2, 레 24:16)
그리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은 아담을 대신하여 이 두 가지 죄목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이 죄목으로 처형하였는가? 고린도후서에 ‘....글자의 사역은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3:6) 라는 말씀이 있다. 유대인들은 성경말씀을 거의 다 암송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말씀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여 예수님을 죽였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완성자임에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니까 안식일을 어긴 죄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그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로 알고 있었기에 신성을 모독한다고 율법에 기록된 대로 사람-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글자는 인격적 융통성이 없기에 죄 없는 예수님 마저도 율법을 통과하지 못한 것이다. 글자의 사역으로 인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한 성경이 역설적으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은 것이다. 율법, 곧 글자의 사역의 끝판 왕이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다. 예수님은 유기적으로 죄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인격 없는 글자, 곧 율법의 심판을 받고 십자가형을 당하신 것이다. 그래서 어떤 육체도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롬 3:20)
예수님도 율법을 통과하지 못하자 이제 어떤 육체도 율법을 통과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유사이래 1등 인간인 예수님이 율법을 통과하지 못함으로서 2등 이하 모든 인류는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확증된 것이다. 1등 인간인 예수님은 2등 이하 모든 인류를 포함하고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이로써 하나님은 죄 없는 자신의 아들마저도 율법을 통과하지 못하자 율법의 무익함으로 인해 율법을 폐하고 새로운 질서를 도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앞서 나가던 명령은 그것의 연약함과 무익함으로 인하여 진실로 폐하여졌도다.’(히 7:18)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율법의 무익성이 하나님과 사람 모두에게 증명되자 하나님은 율법을 폐기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것은 결국 예수님께서 자신의 육체로 우리를 얽어매던 율법을 없애신 것이다.
‘원수 되게 하는 것 즉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화평을 이루려 하심이요,’(엡 2:15)
이제 하나님께서도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인해 더 이상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에 율법을 폐하신 것이다. 이로써 예수님 자신이 ‘율법의 끝마침’이 되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마저도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자 ‘율법의 질서’를 끝내고 ‘은혜의 질서’라는 새로운 질서를 하나님의 최종적인 대책으로 내 놓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