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 16:15) 순서, 서언
올더스조에
2024. 1. 6. 13:26
순 서
서 언
하나님의 영원한 창조 목적인 분
여자의 씨로 오신 분
씨와 땅으로 오신 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이신 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
우리를 대속하신 분(희생물로 오신 분)
우리를 구속하신 분(헌물로 오신 분)
안식일의 주인이신 분
하나님의 관점에서 진실하신 분(참 사람)
하나님이 인정하는 정상적인 사람이신 분
우리의 생명이신 분 (진실은 흙이고 생명은 씨라는 의미)
사람의 위치(진실)을 지키신 분(하나님이 정한 인간의 운명에 순종하신 분)
세상의 상식과 기대밖에 계신 분(율법 밖에 있는 의)
마귀의 궤계를 드러내신 분
마귀에게 승리하신 분(이기신 분)
아버지의 아들로서 근원이 있는 분
우리와 한 형제인 분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첫 열매인 분
우리를 죽음의 두려움에서 벗어나게 하신 분
마귀의 일을 멸하신 분
율법의 질서를 끝내신 분(율법의 끝마침 되신 분)
마지막 아담이신 분(옛 인류를 끝내신 분)
새 인류의 조상인 분(아버지이신 분)
은혜의 새로운 질서를 가져오신 분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의 거짓을 벗겨내신 분
생명의 세계(하나님의 왕국)에 있는 분
모든 것의 모든 것인 분
하나님과 사람의 중재자이신 분
우리의 신랑이신 분
우리의 왕이신 분
우리의 심판자이신 분
참 하나님이신 분
우주질서를 회복하신 분
하늘에 속하신 분 / 믿음의 창시자요 완성자이신 분
서 언
성경의 주제는 그리스도다.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하나님의 왕국에 있다. 사람들은 통상 죄만 없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 그 왕국에 들어가려면 그 생명을 가진 자만이 들어갈 수 있다. 동물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동물의 생명만이 들어갈 수 있고 식물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식물의 생명을 가져야만 들어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야 한다. 우리의 육체로는 설령 죄가 없다하더라도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사람은 본래부터 혈과 육으로 창조되었고 현재의 이 육체로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 살과 피가 아닌 죽지 않을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어야만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가 있다.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이유는 바로 흙으로 창조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해서 이들을 하나님의 왕국 백성으로 편입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그래서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에 있다. 예수님도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은 곧 나에 대하여 증언하는 것들이니라.’(요 5:39) 하였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을 이 땅에 보내서 그분의 씨를 통해 많은 자손들을 번성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왕국을 이 땅에 건설하는 것이 목표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것은 받지 않으신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만 받으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생명만이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왕국이다. 그럼에도 사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이 누구인지 말하라고 하면 그분이 행하신 외적인 행위 몇 가지 외에는 별로 할 말이 없는 것 같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행하는 외적인 부분보다 내적인 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축구선수가 있다고 하면 그 사람의 축구 실력 자체가 그 사람 자체는 아닌 것이다. 마찬가지로 유명가수가 노래를 잘한다고 해서 노래 자체가 그 사람의 인격은 아닌 것이다. 그 사람의 외적인 행위들은 오늘은 가능하지만 내일은 가능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을 알고자 한다면 그의 내면의 인격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 것은 그분의 외적인 행동보다 내면적인 인격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 당시에도 예수님은 자신이 누구인지 제자들에게 묻고 제자들이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하시니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5-16)
위 말씀에 보면 베드로는 정답을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것을 네게 계시한 이는 살과 피가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마 16:17) 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위 말은 베드로 자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베드로 입을 통해 대언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잡혀가자 ‘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라고 세 번 부인하였는데 일반적으로 우리는 베드로가 자신도 체포될까 두려워 예수님을 부인한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세상에서도 자신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남을 위해 죽는 사람이 종종 있듯이 베드로가 예수님을 진심으로 알았다면 예수님을 부인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베드로는 진짜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던 것이다. 그 당시 베드로를 포함해서 그 누구도 예수님을 몰라야 성경이 맞는 것이다. 왜냐하면 베드로가 진짜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알았다면 예수님의 구속은 필요 없기 때문이다. ‘구속’이란 어떤 기준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인데 베드로가 예수님을 알았다면 베드로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구속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속은 필요 없게 된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롬 3:10)라는 성경 말씀이 맞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기 위해 예수님을 부인한 것이 아니라 진짜로 예수님이 누구인지 몰랐던 것이다. 사실 예수님은 세상의 상식과 기대밖에 있던 사람이었다. 세상은 선악의 지식세계, 곧 율법의 세계에 있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이라는 생명의 세계에 계신 분이기 때문에 세상왕국에 속한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이해할 수 없는 분이었다. 물고기가 물 밖의 세계를 알 수 없고, 동물은 사람의 세계를 알 수 없듯이 세상에 속한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을 알고 싶어도 알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겉모습은 같지만 우리는 땅에 속한 생명을 가졌고 그분은 하늘에 속한 생명을 가진 다른 분이라는 것이다.
‘첫째 사람은 땅에서 나서 땅에 속하거니와 둘째 사람은 하늘로부터 나신 주시니라.’(고전 15:47)
그래서 그 당시 제자들을 포함해서 그 누구도 예수님이 십자가로 가기까지 그분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복음서는 그 당시 예수님을 쫓아다니면서 쓴 것이 아니고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그분을 아는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다. 율법의 세계에 있던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 것이 아니라 생명의 세계로 넘어온 사람들에 의한 기록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이해하려면 우리의 시각을 율법적 관점에서 생명의 관점으로 옮겨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은혜로 인하여 율법이라는 죄와 사망의 세계에서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 생명의 세계로 옮겨온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롬 8:2)
성경은 세상 사람들이 우리에게 소망의 이유를 물을 때 대답을 할 것을 항상 예비하라고 말씀하신다.
‘오직 너희 마음속에서 주 하나님을 거룩히 구별하고 너희에게 너희 속에 있는 소망의 이유를 묻는 모든 사람에게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항상 예비하며’(벧전 3:15)
그래서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에게 물으신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마 16:15) 여기에 우리는 우리의 소망을 묻는 이들에게 항상 대답을 할 수 있도록 준비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의 신랑이고 우리는 신부로서 우리는 그분 안에 연합된 한 몸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아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살아내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예수님이 누구인지 아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하나님의 경륜의 방법은 ‘연합’에 있다.(창 2:24) 옛 창조 안에서 아담과 이브가 부부로서 한 몸이듯이 새 창조 안에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신부인 우리가 한 몸으로서 그리스도의 인격이 내 인격이 되고, 그리스도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되고, 그리스도의 모든 것이 내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그리스도를 알아야 한다. 성경은 ‘연합’과 ‘안다’는 말을 같은 개념으로 사용하고 있다.
‘아담이 자기 아내 이브를 알매 그녀가 수태하여 가인을 낳고 이르되, 내가 주로부터 남자를 얻었다, 하니라.’(창 4:1)
주님과 연합되려면 그분을 알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고 말하지만 성경은 그리스도가 우리를 대신해서 죽었다는 말보다는 함께 죽었다는 말을 사용한다.
‘만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그것은 신실한 말이로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리라.’(딤후 2:11)
우리는 그리스도와 한 몸으로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다. 나 혼자 독립만세가 아니다. 그럼에도 세상 사람들은 영생을 얻기 위해 그리스도를 알기보다 내 자신이 그리스도를 위해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행위적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들을 데리고 나와 이르되, 선생들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구원을 받으리이까?’(행 16:3)
행위적 관점의 접근이 세상이고 종교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태어나는 것이지 행위를 통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서도 부모는 자식이 부모의 마음을 알아주길 원하듯이 하나님 아버지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영생은 하나님과 그분 아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주님을 아는 것이 주님과의 연합이기 때문이다.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성경은 우리 스스로가 독립적인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 연합된 존재라고 말한다. 부부이면서도 아내가 남편을 모른다면 얼마나 섭섭하겠는가? 부부간에는 남편의 재산이 아내의 재산이고, 남편의 인격이 아내의 인격이다. 그래서 우리는 신랑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것, 이것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내가 주님을 아는 것 만큼 주님의 것이 내 것이 된다. 따라서 주님의 모든 것을 알면 모든 것의 모든 것이신 주님이 내 것이 된다.
‘거기에는 그리스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자나 무할례자나 바바리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매인 자나 자유로운 자가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만이 모든 것이요 모든 것 안에 계시느니라.’(골 3: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