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빵과 종교와 정치(요일 2:16)
올더스조에
2023. 12. 30. 23:26
빵과 종교와 정치(요일 2:16)
요한일서 2장 16절은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을 정의하기를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라는 세 가지로 말하는데 이는 빵과 종교와 정치라는 세 단어로 요약할 수 있다. 그래서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결국 이 세 가지 범주 안에 다 포함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요일 2:16)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저절로 생성되는 것은 없으며 그 근원이 있다. 왜 위와 같은 말씀이 나왔는지 오늘 이에 대해 생각해 보자.
1.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주신 세 가지 직분
세상의 가장 큰 비밀이 있다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 해답을 찾으려고 하지만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 근원을 알 수 없기에 찾을 수가 없다. 우리는 창조자의 원래 목적을 알아야 이 해답을 찾을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세 가지 직분을 주셨다. 존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하는 대언자의 직분, 아래로는 이 세상을 다스리라는 왕의 직분과 위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직분이다. 이것이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한 목적이고 사람이 수행하여야 할 직분이다. 이 세 가지 직분이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의문을 우리에게 해소해 준다. 그런데 아담이 타락함으로 이 직분을 모두 잃어버렸고 예수님이 오셔서 이 직분을 모두 회복하셨다.
대언자
사람은 자가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라 먹어야 사는 존재이다. 아담이 영생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말은 틀린말이다. 아담은 영생을 얻을 자였지, 영생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창 3:22) 아담이 영생을 가진 자로 창조되었다면 무엇 때문에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고 먹을 것으로 나무 열매와 채소를 주었겠는가? (창 1:29-30) 특히,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될 수 있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요 1:12-13, 벧전 1:23, 요일 3:9)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인데 이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반드시 죽고 다시 태어나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천사는 비록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닌 종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기에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으며 1회 창조로 끝난다.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사람이 죄가 없으면 죽지 않는다면 죄없는 예수님은 죽지 말아야 한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었다. 예수님이 죽었다는 의미는 육신으로 창조된 사람은 어차피 한번은 죽는다는 의미다. 너무도 쉬운 문제를 사람들은 이상하게 믿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육신적 생명과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연결이 되면 생명이고, 단절되면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육으로 창조된 사람이 한번 죽고 영에 속한 몸으로 부활하도록 사람의 운명을 정했다. 그래서 육으로 창조된 사람은 반드시 음식을 먹어야 육신적 생명이 살고,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사는 존재이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 4:4)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사람이 육신적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육체의 삶을 위해서는 빵을 먹어야 살지만 영원한 생명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사는 존재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창조물 가운데 사람의 유일한 특권이 있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있는 유일한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세상의 왕들을 향해 짐승이라고 부르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없는 사람은 짐승과 다름 없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은 말씀이시다라’고 말한다.
‘처음에 말씀이 계셨고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며 말씀이 하나님이셨더라.’(요 1:1)
그래서 말씀을 먹는다는 의미는 생명이신 하나님을 먹는다는 의미다. 예수님도 오셔서 자신을 먹으라고 하셨다.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요 6:57)
사람은 먹는 음식에 따라 자기 육체가 조성되듯이 어떤 말씀을 먹느냐에 따라 그의 영적인 운명도 결정된다. 생명이신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망인 사탄의 말을 먹으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열매 맺게 된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 24:15)
하나님이 말씀이라는 의미는 만물의 근원은 ‘말씀’이라는 의미다. 보이지 않는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가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가만히 계신다면 우리는 그분을 알래야 알 수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방법은 ‘말씀’으로 다가오시는 것이다. 영(靈)이신 하나님의 다른 표현은 말씀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말씀’이 곧 하나님이시라고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이다.(요 1:14) 재림하시는 예수님의 이름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부른다.
‘또 그분께서 피에 담근 옷을 입으셨는데 그분의 이름은 하나님의 말씀이라 불리느니라.’(계 19:13)
‘말씀’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말씀이 영이요 생명인 것이다. 곧 씨다.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요 6:63)
사람은 존재적으로 이러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말씀을 먹을 때 안정이 온다. 차량도 휘발유용과 경유용 차량이 있다. 휘발유차에 경유를 넣으면 차가 고장나듯이 사람이 선악과를 먹었다는 의미는 선악과는 나쁘고 생명과는 좋다는 의미가 아니라 창조주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먹도록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은 하나님 말씀 외에 다른 무엇을 먹어도 안정감이 없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만을 먹도록 창조한 목적은 본성에 속한 육적인 생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로 전환하시려는 것이다. 즉 본성에 속한 몸에서 영에 속한 몸으로 전환되도록 운명 지어진 것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6)
이를 위해 사람은 본성에 속한 몸에서 영에 속한 몸으로 전환되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먹어야 하는 것이다. 영에 속한 몸, 곧 부활의 몸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최종 목적이다. 하나님의 최종목적에 도달하려면 사람은 반드시 씨 하나님 앞에서 흙이라는 사람의 위치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만 씨 하나님께서 흙 사람에게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와 같이 사람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는 밭이다.
모든 창조물 가운데 사람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먹을 수 있는 특권을 가진 존재이다. 말씀을 먹을 수 있는 존재라는 의미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맡겨졌다는 의미다. 하나님의 말씀은 천사에게도 맡겨져 있지 않다. 그래서 천사도 하나님의 말씀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들이 자기들을 위해 그것들을 수행하지 아니하고 우리를 위해 수행하였음이 그들에게 계시되었는데 그것들은 곧 복음을 선포한 자들이 하늘에서 보내신 성령님과 더불어 이제 너희에게 전한 것이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갈망하는 것이니라.’(벧전 1:12)
말씀이신 하나님이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셨듯이 하나님은 말씀으로 일을 하신다.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하여 일하시는 것은 어떤 신기가 내 안에서 작동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안에서 역사하는 것이다. 사람은 모든 창조물 가운데 유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졌고 이 말씀을 먹고 모든 창조물에게 전파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대언자로서의 합당한 직분이다.
왕
하나님께서 창조한 모든 창조물의 머리는 사람이다. 사람은 위로는 하나님을 섬겨야 하고 아래로는 땅을 다스려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모든 창조물 중에 맨 마지막으로 사람을 창조하고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라는 왕의 직분을 주셨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복을 주시고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다산하고 번성하여 땅을 채우라. 땅을 정복하라. 또 바다의 물고기와 공중의 날짐승과 땅 위에서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지배하라, 하시니라.’(창 1:28)
사람은 비록 만유의 머리로 창조되었으나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씨 하나님 앞에서 흙 사람으로 창조되어 육체가 한번은 죽고 영에 속한 몸으로 다시 태어나도록 운명 지어졌다.(고전 15:46) 그래서 사람은 천사를 다스릴 위치에 있으나 죽지 않는 천사보다 몸이 약하게 창조된 것이다.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 주께서 그로 하여금 주의 손으로 지으신 것들을 지배하게 하시고 모든 것을 그의 발아래 두셨사오니’(시 8:5-6)
성경에서 말하는 왕의 직무는 세상의 왕과 다르다. 성경은 세상의 왕을 짐승이라고 부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본래 아담에게 부여한 왕의 직무는 세상의 왕과 다른 성격의 왕을 말하는 것이다.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분배(dispensation)하는 것이듯이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사랑을 분배받아 그 사랑을 만유에게 분배하는 것이 왕의 직무이다. 이 왕의 직무를 잘 수행한 예표가 요셉이다. 요셉은 이집트의 총리로서 이집트에 7년 대기근이 왔을 때 하나님의 계시로 이를 미리 알고 7년 풍년기간에 식량을 미리 저장하였다가 7년 대기근이 오자 백성들에게 식량을 분배하여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였다. 하나님께서 세운 왕의 직무는 세상 왕들처럼 군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을 만유에게 분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아담의 타락으로 이 직분을 잃어 버렸기 때문에 만물은 사람으로부터 이 사랑을 받을 기회를 잃어버린 것이다. 그래서 지금 만물도 신음하며 이 사랑을 받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창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 창조물이 헛된 것에 복종하게 된 것은 자진해서 된 것이 아니요, 소망 중에 바로 그것을 복종하게 하신 분으로 인한 것이니 이는 창조물 자신도 썩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러운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롬 8:19-21)
주님이 왕으로서 직접 다스리는 천년왕국 시대에 사람은 하나님께서 부여한 왕의 직분이 회복되는 시기다. 이 시기는 죄가 사라진 시대로서 맹수들도 풀을 먹고, 서로 죽이지 않고 함께 지내며 독사의 굴에 어린아이가 손을 넣어도 해를 입지 않는다. 이때가 되면 사람은 왕으로서 만유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분배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리도 어린양과 함께 거하며 표범이 염소 새끼와 함께 누우며 송아지와 젊은 사자와 살진 짐승이 함께 있어 어린아이가 그것들을 인도하며 암소와 곰이 함께 먹으며 그것들의 새끼들이 함께 누우며 사자가 소처럼 풀을 먹으며 젖 먹는 아이가 독사의 구멍에서 놀며 젖 뗀 아이가 독사의 굴에 손을 넣을 것이로되 그것들이 내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상하게 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물들이 바다를 덮는 것 같이 주를 아는 지식이 땅에 충만할 것이기 때문이니라.’(사 11:6-9)
‘이리와 어린양이 함께 먹고 사자가 수소처럼 짚을 먹으며 흙이 뱀의 양식이 되리니 나의 거룩한 산 모든 곳에서 그것들이 해치거나 멸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사 65:25)
하나님은 만왕의 왕이시고 우리 각자는 분봉왕들이다. 우리는 왕가의 자손이었으나 아담이 잃어버린 것을 예수님이 회복하심으로 우리들은 왕가의 자손의 명분을 회복하였다. 만물이 회복된 천년왕국 시기에 우리는 왕과 제사장으로서 그 역할을 실질적으로 수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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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우리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이다, 하더라.’(계 5:10)
제사장
사람은 자신을 창조한 창조주 하나님을 섬기며 살도록 운명 지어졌다. 사람은 진화론자들이 말하듯이 저절로 생긴 것이 아니고 근원이 있는 창조물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공경하듯이 지음 받은 자가 지으신 분을 공경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우리는 근본이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인간사에서 가장 심한 욕은 ‘근본 없는 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이다. 소위 세상의 4대 성인 중에 오로지 예수님만이 근본이 있고 다른 사람들은 아버지가 누군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오셔서 사역을 하실 때 줄곧 자기 마음대로 하지 않고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신다고 하였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느니라. 그분께서 무슨 일들을 하시든지 이것들을 아들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요 5:19)
나는 내 뜻을 행하려고 하늘로부터 내려오지 아니하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행하려고 내려왔느니라.(요 6:38)
아버지 없는 아들은 없다. 아들은 아버지의 얼굴이다. 그래서 우리 속담에 아들이 잘못하면 아버지 얼굴에 먹칠한다는 말을 한다. 우리가 제사장이 된다는 의미는 아버지의 아들로서 명분을 다한다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개념 안에는 왕, 제사장, 대언자의 직분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며 이 세 직분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제사장이 된다는 의미는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아들의 도리를 다한다 의미다. 아들의 도리는 아버지를 섬기고 하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아들로서 자기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신다고 하였다.
본래 제사장의 기본 직무는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중재자의 역할이다. 예수님은 대제사장으로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재자, 곧 연결자이시듯이 우리의 제사장 역할은 하나님과 만유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한 만유는 직접 자신들이 하나님께 다가 갈수 없다. 이 역할을 제사장인 우리가 하는 것이다. 만물이 회복된 천년왕국시기에 제사장 직분을 회복한 우리는 사자에게, 호랑이에게, 이리와 같은 맹수에게도, 심지어 뱀에게도 하나님의 사랑을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물론 이러한 직분은 앞서 언급한 왕의 직분과도 겹치게 된다. 우리는 모든 창조물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섬기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현재는 온 창조세계가 신음하며 그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또 온 창조 세계가 지금까지 함께 신음하며 고통 중에 산고를 치르는 줄을 우리가 아나니 그들뿐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리요?’(롬 8:22-24)
2.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함으로서 직분을 상실했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마귀에게 승리하시고 직분을 회복하심.
창세기 3장에서는 아담이 왜 마귀와의 영적전쟁에서 패하였는지 잘 나와 있지 않으나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광야에서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쟁을 통해 창세기 3장에서 마귀가 아담에게 유혹했던 내용을 알 수 있다. 마귀는 천사와 동류이다. 천사 마귀가 사람에 비해 강점이 있다면 ‘능력’과 ‘죽지 아니함’이다. 마귀는 바로 자신의 이 두 가지 강점을 가지고 아담과 예수님을 유혹하였다. 전쟁의 기본은 나의 강점을 가지고 상대방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마귀는 아래와 같은 말로 예수님을 유혹하였다.
첫 번째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명령하여 이 돌들이 빵이 되게 하라.’(마 4:3) 두 번째는'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려라.'(마 4:6) 세 번째는 '자신에게 경배하면 세상 영광을 다 주겠다'(마 6:9)는 것이었다. 마귀가 예수님을 향해 유혹했던 말은 자신은 돌로 빵을 만들 수 있는 능력이 있으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 능력이 있고, 자신이 세상의 영광(왕권)을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 말이었다. 이에 대해 사람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준 사람의 위치를 가지고 대응하였다. 마귀가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라는 말은 ‘네가 신이 거든’ 이라는 의미다. 마귀가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할 때 예수님은 ‘사람은 돌로 빵을 만들 수 있는 것이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사는 존재가 사람이다.’라고 사람의 위치를 가지고 대응하셨다. 두 번째로 '사람은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죽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고 하셨다. 세 번째로 마귀에게 경배하면 세상 영광을 주겠다고 하니까 예수님은 '사람은 마귀를 경배하는 것이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이 사람이다’ 라고 하나님이 정해준 사람의 위치를 지키심으로 마귀에게 승리하셨다. 그리고 예수님은 최종적으로 갈보리 십자가서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려보라'는 마귀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매달리면 당연히 죽는 것이 사람이라는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마귀에게 최종 승리를 하였다.
사람 예수님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신 마귀에게 승리하심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세 가지 직분을 회복하셨다. 사람은 존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하는 대언자의 직분,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죽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당연한 것으로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고 섬기는 제사장 직분, 사람은 세상 영광(왕)을 위해 사는 것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마귀의 유혹을 거절함으로써 하나님의 왕국에서 땅을 통치할 왕의 직분을 회복하신 것이다. 최종적으로 사람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신 마귀에게 최종 승리를 하신 것이다. 사람 예수가 신 마귀에게 승리함으로 진정한 인간 승리를 하신 것이다. 마귀가 '네가 신이거든' 할때 사람 예수님은 '나는 사람이다'라고 하신 것이다. 이 승리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보편적으로 가능한 승리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가 되신 것이다.
3.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함으로서 하나님이 주신 직분을 빵과 종교와 정치로 타락시킴.
그러나 아담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된다는 마귀의 거짓 유혹에 속아 하나님이 정해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아담이 볼 때 빛의 천사로 나타난 마귀는 먹기에 좋고 아름다우며 지혜롭고 탐스러운 열매였다.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그녀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가 먹으니라.’(창 3:6)
그러나 생명나무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어떤가? 살펴보자.
‘그가 그분 앞에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자랄 터이니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사 53:2)
빛의 천사로 나타난 마귀와 예수님의 모습은 얼마나 대조적인가? 빛의 천사로 나타난 마귀는 모든 것이 다 화려하고 좋게 보이는 반면 예수님에게는 그 어떤 모양이나 우아함이나 아름다움이 전혀 없다. 그래서 아담은 마귀의 이러한 겉모습에 속아 넘어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은 눈에 보이는 것에 있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있다.
세상은 일어나는 많은 문제에 대해 여러 가지 진단과 대책을 내놓지만 성경은 세상의 문제를 단 한 가지, 아담이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라고 간단히 말한다. 그리고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결과 세상에서 일어나는 문제의 원인을 단 세 가지로 요약한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은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요일 2:16)
그래서 요한일서 2장 16절은 창세기 3장 6절의 결과이다. 창세기 3장 6절의 ‘먹기에 좋고’는 ‘육신의 정욕’이며,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는 ‘안목의 정욕’이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은 ‘인생의 자랑’으로 연결할 수 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대언자, 제사장, 왕이라는 세 가지 직분을 주셨다. 그러나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함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하는 대언자의 직분을 빵을 먹고 사는 육신의 정욕으로, 하나님을 섬겨야 하는 제사장의 직분을 기적을 추구하는 종교 곧 안목의 정욕으로, 왕의 직분을 세상 지혜를 추구하는 정치로 타락시킨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현 세상을 육신의 정욕–빵, 안목의 정욕-종교, 인생의 자랑–정치로 구성되어 있다고 본다. 세상 모든 사람이 추구하는 목표는 빵과 종교와 정치이다. 즉 사람은 먹고 살기 위해 빵을 추구하되, 종교 안에서 신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 왕이 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그래서 여러 이단 종파 교주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자신들은 죽지 않는 신이라고 주장한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자신이 큰 병이 걸려 죽음이 가까이 와도 왕이 되기 위해, 곧 출세를 위해 매진한다. 이것이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의 공통점이다. 성경에서 종교를 대표하는 민족은 유대인이고 정치를 대표하는 민족은 그리스인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하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선포하노니’(고전 1;22-23) 라고 말하는 것이다.
세상의 두 권력 축이 있다면 종교와 정치다. 그래서 종교와 정치가 통합되면 무소불위 권력이 된다. 과거 왕국은 종교와 정치가 통합된 신정일치였다. 중세 카톨릭이 대표적이고 지금 중동의 일부 국가나 북한도 신정일치 국가이다. 성경에 의하면 마지막 때 등장하는 적그리스도의 왕국도 신정일치 국가이다. 사실 이러한 세상왕국은 자기들 스스로 개념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고 진정한 신정일치인 하나님의 왕국을 모방한 짝퉁왕국이다. 적그리스도 왕국이 무너지고 주님이 다스리시는 천년왕국이 시작되는데 이 왕국이 진정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신정일치 왕국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왕과 제사장은 하나로서 왕의 직분과 제사장 직분은 항상 같이 다닌다.
‘그러나 너희는 선정된 세대요 왕가의 제사장이요 ...’(벧전 2:9)
‘또 우리 하나님을 위해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삼으셨으니 우리가 땅에서 통치하리이다, 하더라.’(계 5:10)
4. 결 언
아담의 타락한 과정을 들여다 보면 결국 현 세상도 보인다. 아담의 세계는 빵과 종교와 정치이다. 이 세계를 성경은 악 현 세상이라고 말한다.
'그분께서 하나님 곧 우리 아버지의 뜻에 따라 이 악한 현 세상에서 우리를 건지시려고 우리의 죄들로 인하여 자신을 주셨으니'(갈 1:4)
아담이 신이 되고 싶어 타락했듯이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의 목표는 종교 안에 신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 왕이 되는 것이다.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아담은 타락했다.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아담 안에서 너무 깊게 속아 있기 때문에 아담의 육체가 죽도록 창조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했지 죽도록 불완전하게 창조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아담이 죽도록 창조되었다면 불완전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실리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창조물은 없다. 하나님은 모든 창조물을 그분의 필요에 의해 완전하게 창조하셨다. 죽는다고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완전'이라는 의미는 죽지 않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하나님과의 연합'을 의미한다. 그래서 성경은 노아를 당대의 '완전한 자'라고 하였고(창 6:9), 현재 구원받은 우리를 향하여 '완전한 자'라고 하는 것이다.(고전 2:6, 빌3:15,골 1:28)
선악과를 먹은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담을 어떻게든 고쳐서 사용하겠다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다. 선과 악의 대표 인물이 가인과 아벨이다. 세상역사는 선과 악, 가인과 아벨의 싸움이다. 선이 악을 이기면 하나님의 왕국이 온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성경이 보는 관점은 선이든 악이든 그것은 둘 다 아담의 타락한 결과다. 뿌리가 같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관점은 아담은 씨가 잘 못되었기 때문에 무엇을 해도 안된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고전 15:45)'이 되셨다 의미는 첫 사람 아담안에 있는 옛 인류를 끝냈다는 의미다. 그래서 새로운 씨로 인류를 대체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 하나님의 대책이다. 그 새로운 씨로 오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이 씨는 세상에 속한 씨가 아니고 하늘로부터 온 씨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그래서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그리스도는 새 사람, 새 인류의 조상인 것이다.
'새 사람을 입었는데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 3: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