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적인 사람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던 때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히 5:7)
1. 하나님의 창조 목표
영이신 하나님의 목표는 자신의 영광을 표현할 몸을 가진 사람에게 있다. 사람이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려면 하나님과 같은 마음, 곧 같은 생명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창조하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씨-생명을 이식하여 거듭나도록 운명을 정하셨다. 즉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에게 하나님 자신, 곧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목표로 하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점이라면 아담은 영생이 없는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영생을 가진 사람이었다. 아담이 무정란이라면 예수님은 유정란이다. 아담이 흙으로 왔다면 예수님은 영생을 주는 씨로 오신 것이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 3:16)
2.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으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죽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는다.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혈통이나 육신이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나야 한다.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 자들이니라.’(요 1:12-13)
우리가 하나님께서 목표로 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곧 거듭나는 것은 출생의 문제이다. 그래서 아담은 처음부터 영생이 없었기에 설령 그가 죄를 짓지 아니하더라도 사망이 군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법과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롬 5:14)
위 말씀을 보면 아담은 오셔야 할 분, 곧 그리스도의 모형이라고 말하고 있다. 모형은 모델하우스와 같은 개념으로 실제 집이 지어지면 허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담을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 쓰려고 하지만 모형은 실재가 아니다. 즉 모형인 아담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고 실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목표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한 사람의 운명은 첫 사람 아담에서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 46절에서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니라.’(고전 15:46)
첫 사람 아담은 죄가 있든 없든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에 육신을 가진 사람은 들어 갈수 없고 영에 속한 몸만이 들어 갈수 있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그래서 육신으로 지음받은 사람은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영에 속한 몸으로 전환되려면 어차피 육신이 한 번 죽어야 한다. 즉 우리는 새로운 몸을 입기 위한 중간 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가 현재 본성에 속한 몸을 입고 신음하는 것은 이 육신을 벗고자 함이 아니고 새로운 몸을 입고자 함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이를 위해 사람은 반드시 영이신 하나님, 곧 생명에 삼켜져야 한다. 우리 죽을 몸이 영에 속한 몸을 입는 과정은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이신 하나님께 삼켜져서, 곧 하나님과 연합됨으로 영에 속한 몸을 입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이다. 이것을 상징하는 의식이 침례이다.
영이신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연합되면 모두 죽는다. 또한 만물은 불에 태워져 새롭게 창조된다. 흙은 불에 태워져 돌이 되고 돌은 더 강한 불에 태워져 영원히 변치 않는 보석이 된다. 우리가 본성에 속한 몸에서 영에 속한 몸으로 전환되는 것도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과정을 거쳐야 되기 때문에 흙으로 창조된 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한다. 영이신 하나님이 소멸시키시는 불이라는 개념에서 번제단과 십자가의 개념이 나온 것이다. 어떠한 쇠든 용광로 안에 들어가 녹여져 새로운 철로 재창조되듯이 우리는 불 하나님께 삼켜져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다. 즉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이기 때문에 인간의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다.
우리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소위 아담의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고 이러한 이유 때문에 정해진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육체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연결되면 생명이고 단절되면 사망이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죽을 몸(mortality)에서 죽지 않을 몸(immortality)으로 전환되도록 정해 놓으신 것이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보이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일어나고 우리가 변화되리니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으리로다.'(고전 15:51-53)
3. 아담은 왜 타락하였나?
전쟁의 기본은 나의 강점을 가지고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사탄은 천사와 동류이다. 천사가 사람과 비교했을 때 강점은 죽지 않을 몸과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이다. 특히 죽지 않는 몸이 가장 큰 장점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의 몸을 입지 않고 사람의 몸을 입고 오셨다고 말하고 있다.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진실로 그분께서는 자기 위에 천사들의 본성을 취하지 아니하시고 자기 위에 아브라함의 씨를 취하셨도다.’(히 2:16)
사탄은 바로 자신의 죽지 않는 강점을 가지고 한 번은 육체가 죽을 수 밖에 없는 아담의 약점을 공격하였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창 3:4-5)
사탄은 자신을 선택하면 죽지 않는 신(천사)이 된다고 아담을 유혹한 것이다. 여기에 아담이 넘어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인간의 가장 큰 소망이 있다면 육신이 죽지 않는 것이며, 가장 큰 두려움은 육신이 죽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속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한 번 죽을 수 밖에 없도록 정해 놓으셨기 때문에 누구도 피해갈 수 없는 것이다. 아담이 타락하자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하셨는데 이는 아담이 죄를 범해 그 벌로 육신이 죽는다는 의미가 아니고 흙-사람은 무엇을 해도 사람이지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없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너는 사탄에게 속았다’ 라고 하는 말씀하시는 것이다.
4. 정상적인 사람의 가장 큰 두려움 : 육신의 죽음
인류 유사 이래 모든 인간의 소망이 있다면 영생불사이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죽음을 가장 두려워한다. 아담도 죽음을 두려워하여 타락하였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 죽을 운명에서 죽지 않을 운명으로 전환된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지 못해 타락한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소망은 부활의 몸을 입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가 현재의 육신을 입고 그대로 있는 것이 아니라 한번 죽고 영에 속한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고 그것을 ‘영광’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더라.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아직 성령님께서 주어지지 아니하였더라.’(요 7:39)
위 말씀은 분명 예수님의 부활을 의미하며, 그것을 영광이라고 표현한다. 그래서 사실 그리스도인 입장에서 죽음과 부활은 하나이다. 예수님도 십자가로 가시기전에 그것을 향해 영광이라고 표현하였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요 12:23)
물론 위 말씀은 부활을 염두에 둔 말씀이라고 할 수 있으나 죽음이 있어야 부활이 있기 때문에 ‘십자가’와 ‘부활’을 동시에 염두에 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사람 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성도의 죽음이 있어야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에 성도의 죽음도 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며, 영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앞에서 귀중하도다.’(시116:15)
그러나 아무리 죽음 뒤에 영광이 있다 하더라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그 누구도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난 자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를 앞에 두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겟세마네 동산에서 다음같이 아들로서 아버지께 같은 기도를 세 번 하였다.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마 26:39)
그런데 사복음서에는 아들로서 아버지께 기도하였지만 아버지가 응답하였다는 기록이 나와 있지 않다. 아들이 아버지께 기도하였는데 응답이 없다면 이상한 것이다.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도 피조물로서 하나님께 다음같이 기도하셨다.
'아홉 시쯤에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쳐 이르시되,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것은 곧,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는 말이라.'(마 27:46)
그런데 결국 그 기도에 대한 응답이 히브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던 때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히 5:7)
위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앞에 두고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이에 대해 하나님께 들으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자 얼마나 인간적인가? 우리는 죽음을 앞에 두고 의연하게 죽는 사람들을 위대한 사람으로 여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상적으로 여기는 사람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는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여긴다. 얼마나 복된가? 예수님은 위대한 사람이 아니고 하나님이 인정하는 참 사람이고 정상적인 사람이다. 우리는 예수님을 단지 범접할 수 있는 신으로서 경배만하는 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정한 죽음이라는 이 위치에서 예수님과 우리가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하나가 된다.
5. 예수님의 부활의 의미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 땅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여 살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람농사의 첫 열매로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도 이제 예수님과 같은 부활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고전 15:20, 약 1:18)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물론 하나님께는 예수님의 부활이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첫 열매다.(고전 15:20) 그러나 육신으로 지음 받아 한 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에게는 현실적으로 아담 이래 이 죽음의 두려움과 공포의 속박에서 해방시켜 주신 것이다.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 내려 하심이라.’(히 2:15)
6.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인간의 운명에 순응하신 예수 그리스도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점은 무엇인가? 아담은 육체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하나님께서 정한 인간의 운명을 거부했다면 예수님은 이 운명에 순종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시기 전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라고 기도하였다. 아들로서 육체의 죽음을 두려하여 죽기 싫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어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하시면서 자기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셨다. 예수님은 당시에 십자가를 회피할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다. 예수님 당시 예수님을 잡으러 온 사람 중 한명인 대제사장의 종의 귀를 베드로가 칼로 베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이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잡는 자들은 다 칼로 망하리라. 너는 내가 지금 내 아버지께 기도하여 당장이라도 그분께서 열두 군단이 넘는 천사들을 내게 주시도록 할 수 없는 줄로 생각하느냐? 그러나 그리되면, 반드시 이렇게 되리라, 한 성경 기록들이 어떻게 성취되겠느냐? 하시더라.’(마 26:51-54)
위 말씀을 보면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할 충분한 능력을 가지고 계셨지만 아버지의 뜻에 순종하신 것이다. 왜, 순종해야 하는가? 아들은 아버지께 순종해야하고, 피조물은 창조자의 뜻에 순종해야 한다. 피조물이란 자기 뜻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정한 인간의 운명(사람의 위치)을 지키는 자에게만 영생을 주실 수 있다. 온 우주 가운데 창조자의 목적보다 더 큰 목적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자기 뜻을 버리고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아버지의 뜻에 순종한 것이다.
‘그분께서 아들이실지라도 친히 고난 받으신 일들로 말미암아 순종하기를 배우사 완전하게 되셨으므로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영원한 구원의 창시자가 되시고 하나님에 의해 멜기세덱의 계통에 따른 대제사장이라 불리셨느니라.(히5:8-10)
예수님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의 아들 독생자이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하기를 배우사 완전하게 되신 것이다. 과거에 왕국의 세자는 저절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전쟁에 나가 승리함으로서 완전하게 되어 왕위에 올랐다. 예수님은 바로 하나님의 왕국에서 아들이셨지만 영적전쟁에서 사탄에게 승리함으로 완전하게 되어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신 것이다.
‘우리의 믿음의 창시자요 또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보자.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시하시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히 12;2)
7. 결 언
일반적으로 신이 되고 싶어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은 예수님을 신으로만 안다.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인류에게 가장 큰 비밀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목표로하는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지 신이 아니다. 아담이 하나님의 목적에 이탈한 옛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목표로 하는 새인류의 조상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십자가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정상적 위치를 죽기까지 지킴으로 죽으셨다. 하나님은 이 위치에 있는 사람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여기고 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영생을 주실 수 있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한 인간의 운명을 거부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정한 인간의 운명에 순종하심으로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첫 열매가 되셨다.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한 흙이라는 사람의 운명을 부끄러워하여 사탄에게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죽지 않는 천사를 부러워하며, 우리 자신의 연약한 위치를 한탄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이 오셔서 우리 인간의 위치(인격)를 회복시켜주심으로 인격이 얼마나 고귀하고 영광스러운 자리인지 깨닫게 되었다. 비록 사람은 천사보다 약하게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아들의 위치로 창조되었고 죽음을 통과한 자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보다 우주 가운데 더 큰 일은 없다. 만일 사탄도 죽을 수 있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은 아들에 있다. 우주 안에서 이 보다 더 큰 목적은 없다. 그런데 아들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반드시 흙으로 만들어져 한 번 죽고 영에 속한 몸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전 15:46) 우리가 현재 이 육신을 입고 신음하는 것은 이 육신을 벗고자 함이 아니고 새로운 몸을 입기 위한 과정인 것이다.(고후 5:4)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의 위치가 얼마나 고귀한지 깨닫고 하나님께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운명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는 것은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정상적인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인정하는 사람이다.
예수님으로 인해 되찾은 고귀한 인격(사람의 위치)에 감사하고 찬양하자. 사람의 위치, 성경이 말하는 인격은 세상이 말하는 인격과는 다른 것으로 하나님께서 창조시 부터 정해주신 것으로 변개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영생을 주실 수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힘을 빼고 인정만 하면 되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아담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 왜 우리 인간을 이렇게 나약하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하소연 한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원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최선의 방책을 수행하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내가 생각하건대 이 현 시대의 고난들은 앞으로 우리 안에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될 수 없도다.’(롬8;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