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롬 5:14)
올더스조에
2023. 7. 21. 21:23
1. 들어가는 말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의 논증을 전개하기 위해 먼저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해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다는 '법리적 논증'을 당시 로마법에 익숙한 로마교인들에게 전개하려고 하였다. 당시 로마교회는 유대인과 이방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로마제국이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상황에서 로마법에 익숙한 이방인들과 율법에 익숙한 유대인들은 모두 ‘법이 없으면 죄도 없다’라는 소위 ‘죄형법정주의’라는 상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율법이 올 때까지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아니하였으니라.’(롬 5:13)
당시 바울도 로마 시민권을 가지고 있었기에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바울이 유대인들과 이방인을 법리적으로 검증해 보니 그들이 모두 죄 아래 있다고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어떠하냐? 우리는 그들보다 나으냐? 결코 아니라. 우리는 앞에서 유대인들과 이방인들을 검증하여 그들이 다 죄 아래 있음을 입증하였느니라.’(롬 3:9)
결국 이 말은 모든 사람은 율법 아래서 죄인이고 이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는 논리다.
그러면 ‘죄형법정주의’라는 사고방식 하에 있던 로마교회 교인들은 이런 의심을 가질 수가 있다. 율법이 들어오기 전(아담부터 모세까지)에는 어떠했는가에 대한 의문이 생길 수 있었던 것이다. 율법은 모세에게 주어졌으니 모세이전에는 율법이 없으니 죄가 없었을 것 아닌가 하는 당연한 의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바울은 갑자기 로마서 5장 12절에서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죄가 들어왔고 이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고 '법리적 논증에서 유기적 논증'으로 전환한다. (참고 : 이글에서 사망은 육체적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단절을 의미함)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롬 5:12)
앞에서는 ‘모세에게 율법이 주어졌고 법리적으로 검증해 보니 모든 사람이 죄인이다’라고 말하다가 갑자기 바울이 ‘아담 한 사람으로 인해 죄와 사망이 들어왔다’라고 유기적 논증을 하니 ‘죄형법정주의’ 사고방식을 가진 로마교인들로서는 모세이전에는 율법이 없었는데 왜 죄와 사망이 들어왔나? 라고 하는 의문이 들수 있었다. 그래서 이에 대한 추가 설명이 필요했던 것이다. 즉, 법리적 논증을 펼치다 유기적 논증으로 전환하여 아담으로 인해 죄와 사망이 들어왔다고 하니 법리적 사고방식에 익숙해 있던 로마교인들로서는 이해가 어려웠던 상황이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에 대한 추가 설명으로 로마서 5장 13-14절에서 ‘율법이 오기 전까지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법이 없었기 때문에 법리적으로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않은 것은 맞다. 그렇다면 그때는 사망이 군림하지 않아야 하지 않는가? 라고 당신들은 의문을 가질 수 있다. 그런데 아담부터 모세까지 아담과 같은 범죄를 짓지 아니한 사람들에게도 사망이 군림하였다. 왜냐하면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기 때문이다. 이는 설령 아담이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아담은 ’생명이 없는 모형‘ 즉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사망이 군림할 수밖에 없었다.’ 라고 유기적으로 설명하는 것이다.
‘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임하였느니라. 율법이 올 때까지 죄가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을 때에는 죄를 죄로 인정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법과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 (模型, figure) 이니라.’(롬 5:12-14)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은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사망에 이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착각 속에 있다. 그런데 로마서 5장 12-14절 말씀을 살펴보면 아담 한 사람의 죄로 말미암아 세상에 사망이 들어온 것은 맞다 하지만 소위 아담과 같은 원죄가 없더라도 사망이 군림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결국 이 말씀의 의미는 첫 사람 아담은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근원적으로 사망이 임하였다는 것이다.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의아해 할 것이다. 대부분 교회에서는 이 말씀의 근원을 모르니 제대로 해석하는 곳이 없다.
바울은 이에 대한 해답을 바로 하는데 이는 '아담은 오셔할 분의 모형'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즉, 아담은 실재(實在) 가 아니고 모형 (模型, figure)이기 때문에 사망이 임하였다는 것이다. 모형이란 실물을 모방하여 만든 것이고 실재란 실제로 존재함이란 의미다. 건축의 예를 든다면 모형이란 모델하우스라와 같은 개념으로 모델 하우스는 실제 집이 완성되면 그 역할이 다하는 것이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은 죄가 있든 없든, 훌륭하든 안하든 모형으로서 실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면 그 역할은 끝나는 것이다. 모델하우스는 건축자의 최종목표가 아니듯이 모형인 아담은 하나님의 최종목표가 아니다. 그러나 우리 일반적인 사람들은 첫 사람 아담을 어떻게 해서든지 고쳐서 쓰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이 종교다. 그러나 첫 사람 아담은 무엇을 해도 하나님의 목적에 이를 수 없다. 왜? 모형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모형으로서 육체로 지음받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육에 있지 않고 실재인 영에 있다.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요 6:63)
모형은 무엇을 해도 모형이지 실재가 아니다. 일반적인 우리 그리스도인 들은 죄만 없으면 다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육은 무엇을 해도 육이다. 그래서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고 오직 영만이 살리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르려면 첫 사람 아담에서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전환되어야 한다. 첫 사람 아담은 죄와 관계없이 근원적으로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둘째 사람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첫째 사람과 둘째 사람 사이에는 십자가가 있다. 첫째 사람에서 둘째 사람으로 전환되려면 죄와 관계없이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은 하나님과 연합되어야 하는데, 하나님 자신이 영으로서 영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기 때문이다.(히 12;29) 영 하나님이 불이라는 개념에서 화염검-번제단-십자가의 개념이 나온 것이다. 즉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라는 것이다. 그래서 흙으로 지어진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 목표인 영생으로 얻으려면 십자가 하나님과 반드시 연합되어야 한다. 이 의미는 죽음을 통과해서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서 사람은 죄를 용서 받기 위해서도 예수님을 믿어야 하지만 죄가 없어도 예수님을 믿고 영생을 얻어야 할 운명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을 믿지 않는 것이 죄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요 16:9)
아담은 본래부터 영생이 없었다. 로마서 5장 14절에 의하면 첫 사람 아담은 설령 죄가 없더라도 사망이 군림하였다. 그러므로 아담은 근원적으로 예수님을 믿고 둘째 사람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이며 이를 벗어 난 것이 죄와 사망이다.
2.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왜 창조했는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사람을 목표로 창조하였다. 이는 다른 말로하면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가 되어야 한다.
3. 그러나 아담은 원래부터 생명을 가진 자로 창조되지 않았다.
'모형(Figure)'이란 말은 실재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아담은 원래부터 하나님의 창조목적 안에 있지 않았고 아담이 창조 목적 안으로 들어오려면 실재, 즉 영생을 가진 자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아담의 범죄로 육체적 사망이 들어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하나님과의 연결과 단절을 말하는 것이지 우리의 육체적 생명과 사망을 의미하지 않는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의미하므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전선이 연결되어 불이 들어오면 살았다고 전선이 끊어지면 죽었다고 하는 거와 같은 개념이다. 아담은 피조물로서 처음에 영생을 가진 자가 아니었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영생을 얻을 자였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중의 하나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창 3:22)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사람을 흙으로 창조해서 하나님의 씨(생명)을 이식해서 사람이 영적인 몸을 가진 사람으로 거듭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설령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창조목적에 이를 수 없고 가만히 있으면 사망의 길로 가게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우리의 창조된 육체는 설령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그래서 성경은 육은 죄가 있든 없든 유익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느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요 6:63)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는 것인데 문제는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에 육으로 창조된 사람은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고 반드시 영적인 몸을 입어야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이다. 동물의 왕국은 동물의 생명을 가져야 하고 사람의 왕국은 사람의 생명을 가져하고,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야 들어가는 것이다. 물고기의 생명을 가져야 물 속에 살 수 있고 새의 생명을 가져야 공중에 살 수 있듯이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의 생명을 가져야 들어 갈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실 그 왕국은 그 생명인 것이다.
4. 사람은 죄가 있든 없든 본성에 속한 몸은 한 번 죽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도록 운명지어졌다.
하나님의 창조 목표는 사람이 사람의 생명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아담은 죄가 있든 없든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자로 다시 태어나야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어 씨를 받아 들여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도록 운명지어졌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 24:15)
일반적으로 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들만 부활하는 것처럼 말하나 실상은 모든 사람이 부활하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듯이 하나님의 씨를 심으면 의로운 자로, 사탄의 씨를 심으면 불의한 자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죄의 유무와 관계없이 본성에 속한 몸에서 영에 속한 몸으로 부활하도록 정해진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몸으로 부활하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아담은 오셔야할 자의 모형'이라는 말씀의 결론이다.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4)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전 15:46)
사람 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흙으로 지어진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씨를 뿌려 사람이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 열매를 추수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아담은 오셔야 할자의 모형, 곧 본성에 속한 몸으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명-씨를 이식받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영적인 몸으로 전환되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본성에 속한 것이 첫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몸으로 전환되도록 운명지어졌다.(고전 15:46) 이것이 하나님의 최종 창조 목표다.
5. 새 인류의 조상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
결국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목적을 이루기 위해 흙으로 창조된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씨를 어떻게 주느냐에 달려있다. 첫 사람 아담으로는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달성할 수가 없다. 그래서 누군가 영생의 씨를 가진 다른 사람이 와서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창세기 3장 15절에서 인류에게 여자의 씨를 가진 자가 온다고 약속하셨다.
‘내가 너와 여자 사이에 또 네 씨와 그녀의 씨 사이에 적개심을 두리니 그 씨는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위 말씀은 아담이 타락하자 사탄의 씨와 그녀의 씨가 서로 적이 된다고 약속하신 것이다. 그녀의 씨, 곧 여자의 씨인데 여자에게는 씨가 없다. 그래서 이 씨는 하늘로부터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한다. 또한 이 씨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셨고 이 씨가 성령으로 잉태하여 마리아에게서 태어난 그리스도라고 성경은 말한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 3:16)
아담은 죄가 있든 없든 하나님의 생명이 없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적에 이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영생을 가진 새로운 자가 와서 인류의 새로운 조상이 되어야 하는데 이분이 그리스도다. 우리가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데 '주님'이라는 말은 조상이라는 의미다.
6. 첫 사람 아담의 임무는 둘째 사람이 오면 끝나는 것이다.
아담이 무정란이라면 예수님은 유정란이다. 하나님의 목적에 이르려면 유정란이 되어야 한다. 무정란의 궁극적인 목적은 유정란이 되어 새로운 생명을 산출하는 것이다. 무정란은 유정란이 오면 그 임무는 종료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둘째 사람 예수님이 오면 그 임무가 종료되는 것이다. 계속해서 첫 사람으로 있으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를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첫 사람에서 둘째 사람으로 전환되어야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이를 수 있다. 하나님은 왜 아담을 처음부터 예수님처럼 영원한 생명(씨)이 있는 유정란으로 만들지 않았는가? 이는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요 1:12-13) 그래서 천사는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기 때문에 1회 창조로 끝나지만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기에 반드시 흙으로 창조된다음 하나님의 씨를 받아드려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아담은 본래부터 씨가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의 목적에 이를 수 없다. 죄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이탈한다는 의미이며 바로 이게 사망이다. 그래서 첫 사람 아담과 같은 범법을 저지르지 않아도 아담 안에서는 사망이 군림하는 것이다.(롬 5:14) 우리들은 일반적으로 아담이 범법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죽지 않고 살았을 건데 라는 낮은 관념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아담은 창조 시부터 영생이 없었기 때문에 가만히 그대로 있으면 사망으로 가게 되어 있었다.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으로 들어오려면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둘째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와 한다. 사람은 설령 죄가 없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도록 운명지어진 것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으로 인류의 근원적인 죄가 되는 것이다.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요 16:9)
로마서 5장 14절에서 '모형(Figure)'이란 모델 하우스와 같은 개념이다. 모델하우스란 실제 집이 지어지면 그 임무가 종료되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오셔야 분의 모형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법과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롬 5:14)
위 말씀을 보면 아담은 설령 죄를 범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사망이 군림할 수 밖에 없었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아담은 영생을 가진 자로 창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첫 사람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기 때문에 죄의 유무와 상관없이 근원적으로 실재이신 둘째 사람 예수님이 오시면 그 임무가 종료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류를 보실 때 두 사람만 보신다. 첫 사람 아담 안에 있는가? 아니면 둘째 사람 예수님 안에 있는가? 이다. 하나님의 창조목적은 근원적으로 우리가 첫 사람 아담 안에서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옮겨와 새로운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둘째 사람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창조물인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 5:17)
새로운 창조물이란 새사람으로 새인류이다.
'새 사람을 입었는데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 3:10)
아담은 옛 사람, 곧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새 사람, 곧 새 인류의 조상이다.
7. 그렇다면 왜 전능하신 하나님은 사람에게 죄를 허용하셨을까?
사람은 원래부터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죄와 관계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들어와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죽음 또한 사람의 죄와 관계없이 사람에게 생명을 주기위해 창세전에 정해져 있었다.(고전 2:7) 첫째 사람과 둘째 사람 사이에는 번제단 곧 십자가가 있다. 이는 하나님 자신이 소멸시키시는 불이기 때문이다. (히 12:29) 그래서 하나님은 용광로라 할수 있다. 만물은 용광로안에서 재창조듯이 우리도 용광로 하나님 안에서 번제헌물로 태워져 영원히 변치 않는 보석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 자신이 소멸시키시는 불이라는 개념에서 번제단과 십자가라는 개념이 나온 것이다. 이를 상징하는 것이 침례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자신이 십자가라 할 수 있다. 우리는 죄의 유무에 상관없이 십자가를 통과하지 않고는 둘째 사람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은 자신의 창조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어찌하든지 첫 사람을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으로 불러모아야 한다. 이를 원활하게 하기위해 사람에게 죄를 허용하시고 율법을 주신 것이다.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이다. (롬 5:20) 죄와 율법은 하나다. 율법아래서는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죄, 곧 율법은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라고 하는 것이다.(갈 3:24) 사람은 어리석기 때문에 자신이 죄인인지 아닌지 구분하기 어려운 애매한 상태, 즉 흙과 백이 명확히 하지 않으면 분별이 쉽지 않아 자신을 구원할 구원자를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이를 명확히 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죄 아래 가두고 이 죄로 부터 자신을 구원할 구원자를 찾게하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