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연합에 의한 구원의 원리

올더스조에 2023. 4. 25. 22:11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을 달성하기 위해 방법은 하나님과의 ‘연합’, 곧 결혼에 있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 2:24)

 

여자는 아무리 가난하더라도 부자와 결혼하면 남편의 재산이 아내의 재산이 되듯이 우리의 구원도 신랑이신 주님과 연합(결혼)함으로 주님이 하신일이 내일이 되고, 주님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되고 주님의 구원이 내구원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데는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나의 어떠함에 달려있지 않고 오직 주님께 달려있는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주님이 하신 일을 '인정'하는 것이다.

 

'누구든지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곧 그에게는 아버지가 없되 아들을 인정하는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

 

그런데 이러한 기본적인 연합의 구원의 원리를 모르는 그리스도인들이 의외로 너무 많은 것 같다. 그래서 소위 믿음이 좋다는 사람들도 만나서 이야기 하다 보면 의외로 우리의 구원이 예수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더하여 우리의 행위를 끝까지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물론, 우리는 구원받은 사람들로서 자신의 믿음의 행위를 드러내는 것은 중요하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어떠한 것을 더하여 선포하는 것을 '다른 예수', 곧 '다른 복음'이라고 말하고 있으며, 이것을 선포하는 자는 심지어 저주를 받는다고 기록하고 있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선포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선포하거나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영이나 너희가 수용하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 너희가 그를 잘 용납하는도다.'(고후 11:4)

 

'그러나 우리나 혹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 우리가 너희에게 선포한 복음 외에 어떤 다른 복음을 너희에게 선포하면 그는 저주를 받을지어다.'(갈 1:8)

 

성경은 부부가 한 몸이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실제적으로 두 사람이다. 성경은 이혼을 금하고 있지만 사실 요즘같이 이혼이 성행하는 세상적 관점에서 보면 이브가 선악과를 먼저 먹고 이브가 아담에게 줄 때 아담이 먹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디모데전서 2장 13-14절 말씀을 보면 첫 사람 아담은 속지 않았고 이브가 속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는 아담이 먼저 지어지고 그 뒤에 이브가 지어졌으며 또 아담이 속지 아니하고 여자가 속아 범법 가운데 있었기 때문이라.’(딤전 2:13-14)

 

그러므로 우리의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아담은 이브와 관계없이 별도로 잘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아담은 사망으로 들어 갈 줄 알면서도 이브가 주는 선악과를 먹고 사망의 길로 일부러 갔다.

 

여자가 보니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그녀가 그 나무의 열매를 따서 먹고 자기와 함께한 자기 남편에게도 주매 그가 먹으니라.’(창 3:6)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깊은 하나님의 깊은 경륜이 숨어 있다.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의 결혼에 있듯이 성경의 주제는 하나님과 사람의 결혼에 대한 이야기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을 예표하고 이브는 사람을 예표한다. 하나님은 남녀의 결혼을 한 몸으로 표현하고 있다.(창2:24) 이는 장차 하나님과 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계시록에 22장에 17절에 '성령과 신부가 말씀하시기를, 오라, 하시는도다. 듣는 자도, 오라, 할 것이요, 목마른 자도 올 것이요, 또 누구든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취하라.' 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 보면 성령과 신부가 따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가 되어 말씀하고 있다. 지금 세상에서 부부는 실제적으로 분리된 두 몸이지만 계시록에 가면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한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부부는 하나님이 보실때 한 몸이다.

 

그런데 만일 이브가 범죄하였을 당시 아담이 이브를 버리고 혼자 살겠다고 갔다면 어떤일이 벌어질까? 이 당시 사람은 아담과 이브 밖에 없기 때문에 아담 혼자서는 생육하고 번성할 수 없기 때문에 인류는 지구상에서 사라졌을 것이고, 이에 따라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수포로 돌아 갔을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큰 이유는 하나님을 예표하는 아담이 아내인 이브를 버린다면 부부는 한몸이라고 하신 하나님의 말씀은 거짓말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래서 이것은 성경적 관점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장차 하나님과 사람이 부부로서 한 몸이 될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신뢰에 금이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이루어진다. 우리는 형상을 가진 육적인 사람이기 때문에 시간의 제한 속에 살지만 영이신 하나님은 시간의 제한이 없는 분이다. 우리의 관점에 보면 우리는 아직 하늘에 있는 처소에 앉혀있지 않지만 하나님은 우리가 이미 하늘의 처소에 앉아 있다고 말씀하고 있다.

 

'또 함께 일으키사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우리를 하늘의 처소들에 함께 앉히셨으니'(엡 2:6)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은 우리는 이미 우리 안에 성령이 내주함으로 신랑이신 그리스도와 한 몸이다. (롬 12:5) 이러한 그리스도와 우리가 한 몸이라는 개념 안에는 하나님의 깊은 구원의 경륜이 내포되어 있다.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이브만 선악과를 먹고 아담은 먹지 않는다? 이런 개념은 성경에 없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예표하는 아담은 사망으로 갈 줄 알면서도 이브가 주는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둘째 사람 예수는 죄가 없었다. 하지만 예수님은 죄인인 우리를 신부로 맞이 하기 위해 죄인의 모습으로 일부러 죽음 안으로 들어가셨다. 우리의 인간적 관점에서 보면 첫 사람 아담은 아내인 이브를 위해 일부러 희생하였고, 마찬가지로 둘째 사람 예수는 우리를 신부로 맞이 하기 위해 일부러 희생하셨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는 결혼에는 하나님의 조건 없는 깊은 사랑, 절대적인 사랑, 죽음 보다 강한 아가페적 사랑이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성경적 관점에서 부부는 한 몸이기 때문에 남편과 아내가 따로 따로 독자노선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결혼에는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의 사랑이 내포되어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적 절대적 사랑이다. 인간사에도 자식을 낳은 엄마는 아기를 위해 자기 목숨을 내 던지는 아가페적 사랑이 본능적으로 내포되어 있다. 옛 창조 안에서 아담과 이브는 부부로서 한 몸이듯이 새 창조 안에서 예수님과 교회는 부부로서 한 몸이다.

 

‘우리는 그분의 몸과 그분의 살과 그분의 뼈들에 속한 지체들이니라.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그들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이것은 큰 신비니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 5:30-32)

 

어떤 이들은 예수님이 한 일이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느냐고 반문할 수 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과 교회는 부부로서 한 몸이라고 말한다. 부부는 한 몸으로서 아내의 한 일이 남편의 일이고 남편의 일이 아내의 일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신부인 우리는 그리스도의 것이 내 것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원의 원리가 바로 여기에 있다. 주님과 나는 연합된 한 몸이다. 그래서 성경은 주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다고 말하지 않고 우리와 '함께' 죽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아 그분과 함께 묻혔나니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힘입어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진 것 같이 우리도 생명의 새로움 속에서 걷게 하려 함이라.’(롬 6:4)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 6:5)

 

‘우리가 이것을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 6:6)

 

‘만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그러나 내가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느니라. 나는 지금 내가 육체 안에서 사는 삶을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신 하나님의 아들의 믿음으로 사노라.’(갈 2:20)

 

‘그것은 신실한 말이로다. 우리가 그분과 함께 죽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리라.’(딤후 2:11)

 

그러므로 우리는 나를 생각하지 말고 주님이 누구신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 신랑이신 주님의 승리가 내 승리가 되고, 주님의 재산이 내 재산이 되고, 주님의 인격이 내 인격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우리를 보실때는 우리를 보시는 것이 아니고 주님을 보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에 우리는  흠이 없고 거룩한 것이다.

 

'곧 우리가 사랑 안에서 자신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세상의 창건 이전에 그분 안에서 우리를 택하셨으며'(엡 1:4)

 

'또 그것을 점이나 주름이나 그런 것이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 자기를 위해 제시하려 하심이며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 5:27)

 

'이제는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자기 육체의 몸으로 화해를 이루사 너희를 그분의 눈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제시하려 하셨으니 '(골 1:22)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달려 있다.

 

'다른 사람 안에는 구원이 없나니 하늘 아래에서 우리를 구원할 다른 이름을 사람들 가운데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였더라'(행 4:12)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 14:6)

 

성경은 그리스도를 믿는 우리에게 장차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미래로 말하지 않고 '이미 구원을 받았다'라고 과거로 말하고 있다. 우리가 구원, 곧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단회적인 출생의 문제이지, 행위의 문제가 아니다.

 

'너희가 믿음을 통해 은혜로 구원을 받았나니(saved) 그것은 너희 자신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니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것은 아무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엡 2:8-9)

 

타 종교와 기독교와의 근본적 차이가 있다면 타 종교는 모두 행위를 통해서 구원에 이르겠다는 것이지만 기독교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 것을 전부 ‘태어났다(was born)’라고 출생의 문제로 성경은 말하고 있다. (요 1:12-13, 벧전 1:23)

 

그분을 받아들인 자들 곧 그분의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권능을 그분께서 주셨으니 이들은 혈통으로나 육신의 뜻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에게서 태어난(were born) 자들이니라.’(요 1:12-13)

 

‘너희가 다시 태어난 것은(Being born again) 썩을 씨에서 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에서 난 것이니 살아 있고 영원히 거하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된 것이니라’(벧전 1:23)

 

종교는 나의 행위를 통해 구원에 이르겠다는 것이지만 그리스도의 복음은 행위와 관계없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나야 하는 '출생'의 문제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에 더하여 그 어떤 것을 더하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를 심각히 훼손하는 ‘다른 복음’으로 구원이 없는 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와 동일시 된다는 의미다. 부처를 인정하면 부처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히틀러를 인정하면 히틀러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김정은을 인정하면 김정은이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을 인정하면 예수님과 같은사람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을 창조하고 하나님의 아들로 우리를 삼기위해 모든 것을 행하셨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우리는 다만 주님을 인정하기만 하면 된다.

 

'누구든지 아들을 부인하는 자에게는 곧 그에게는 아버지가 없되 아들을 인정하는(acknowledge) 자에게는 아버지도 있느니라.'(요일 2: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