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道)를 아십니까?
성경은 인생에게 생명의 길(道)과 사망의 길(道), 곧 두 개의 길(道)이 있다고 말한다.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잠 21:8)
유사 이래 많은 사람들이 도(道)를 찾아왔고, 도(道)를 닦아왔다. 세상에는 소위 도사(道士)라고 불리는 많은 사람들도 있고, 또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각 분야의 도사(道士)라 불리길 좋아한다. 그러나 지금도 세상에는 많은 구도자(求道者)들이 있지만 향방(向方)없이 길을 가고 있다.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길(道)을 모르니 제멋대로 가는 것이다. 목표없이 허공을 향해 주먹을 휘두르는 거와 같다.(고전 9:26)
그렇다면 성경이 제시하는 도(道)란 무엇인가? 성경에서는 처음 도(道)에 대해서 창세기 3장 24절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 남자를 쫓아내시고 에덴의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사방으로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道)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이 도(道)는 생명의 길, 곧 예수의 길, 둘째 사람(고전15:47)이 가야할 길(道)이다. 인생은 원래 생명나무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아들로 완성되어야 했다. 그래야 영존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런데 생명과 대신 선악과를 먹고 이 길(道)에서 이탈하였다. 생명나무의 길로 가야하는데 반대 방향인 선악의 지식나무의 길로 가버린 것이다. 이 궤도에서 이탈한 것을 성경은 죄라고 한다.
그래서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다 길(道)에서 벗어나 각각 자기 길(道)로 갔다.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도다.’(롬3:10-12)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길을 잃고 각각 자기 길로 갔거늘 주께서는 우리 모두의 불법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그러므로 우리는 도(道)를 찾더라고 제대로 된 길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구도자들은 반대 방향의 길로 가고 있다. 아담도 처음에 하나님께서 생명의 길을 가도록 권유했으나 선악과를 먹는 날에 신들(천사들)과 같이 될 것이란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다른 길로 갔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라.’(창3:5)
하나님은 각각의 피조물을 필요에 의해서 창조했다. 사람은 사람의 위치를 지켜야 하고, 천사는 천사의 위치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우주질서가 제대로 돌아간다. 그런데 각 피조물이 자기 위치를 이탈하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께서 창조한 우주질서에 혼란이 온다. 성경은 피조물이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는 것을 죄라고 한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고 그 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이식하여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 창조 목표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상태는 하나님이 씨를 심으려고 해도 이미 다른 씨가 심겨져 있는 상태가 된 것이다.
아담이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했지 사람이 신들이 되라고 창조하지 않았다. 사람의 신분을 이탈한 것, 이것이 죄다. 피조물인 사람은 본래 생명나무의 길로 가야할 운명이었는데 자신의 운명을 거부하고 사람이 죽지 않는 신들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 죄다. 개는 개가 되어야 하고 소는 소가 되어야 한다. 개가 소같이 되려고 한 것 이것이 죄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신분을 이탈한 것이 죄다. 개가 소같이 되려고 한다고 해서 절대로 개가 소가 될 수 없다. 사람이 신이 되려고 아무리 해보았자 신이 될 수 없다. 아담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그럼에도 선악과를 먹은 세상 사람들의 최종목표는 전부 신들, 곧 왕이 되는 것이다. 과거 왕들은 신적 존재였다. 지금도 세상과 종교 안에서의 최종 목표는 신이 되는 것이다. 종교 안에는 있는 교주들을 보라. 교황을 비롯한 이단 사이비는 그 안에서 다 신적 대우를 받는다. 그러나 이 신(천사)는 아버지와 아들(사람)의 종이다. 그러니 하나님 보시기에 얼마나 한심스러우시겠는가? 아들이 종이 되려고 노력하고 있으니 말이다. 생명나무의 세계는 아들의 세계고 선악과의 세계는 종의 세계다.
종교와 세상에 있는 소위 도사(道士)들을 보라. 그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해탈하여 죽지 않는 신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흙으로 지어진 사람이 하나님이 아들이 되려면 반드시 하나님의 씨를 이식받은 다음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이다.
사람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사람의 신분을 벗어버리고 신이 되려고 하는 것이 죄다. 아담도 이 열매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따서 먹은 것이다.(창3:6) 지금도 세상 사람들은 신의 경지에 이르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각종 영화와 소설을 보라. 대부분 인간성을 초월하기 위한 것이다. 어떻게 하면 특별한 존재가 되는가에 모든 초점이 맞추어져 있고 이런 사람들을 세상과 종교안에서는 경탄의 눈으로 쳐다 본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것을 죄라고 한다. 하나님이 원래 정해주신 사람의 길을 이탈하여 신들의 길로 가려한 것이 죄다.
생명나무의 세계는 인격의 세계다. 그러나 선악과의 세계, 여기는 신들의 세계, 곧 능력의 세계다. 그러므로 당연히 사탄이 오는 것은 권능과 표적들과 거짓 이적들로 온다.
'그 사악한 자가 오는 것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권능과 표적들과 거짓 이적들과 불의의 모든 속임수와 함께 멸망하는 자들에게로 오는 것이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아니하여 구원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라. '(살후2:9-10)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이 땅에는 모든 사람이 궤도를 이탈하여 정상적인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나무의 길에서 이탈한 사람, 신들이 되려고 발버둥치는 사람들을 정상적인 사람으로 재창조하시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은 자신이 곧 생명나무이시자 정상적인 사람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내가 어디로 가는지 너희가 알고 또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요14:4)
그러자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어찌 그 길을 알겠나이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대답하셨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요14:6)
우리는 일반적으로 길을 어떤 방법, 지도(地圖)와 같은 것을 생각한다. 장소적 개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곧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라는 인격이 걸어간 길, 곧 예수와 함께 죽고 다시 사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짓는 분이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열매는 사람의 부활이다. 그래서 예수는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첫 열매다.(고전 15: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하나님은 예수라는 첫 열매를 통해서 종자 씨를 얻었고 이 종자 씨를 파종해서 많은 열매를 수확하고 계신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사람 농사의 열매로 수확되려면 우리도 예수와 같은 농사 과정을 거쳐야 한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열매는 사람의 부활이고, 부활은 말 그대로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없이는 열매-부활이 없는 것이다. 지금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죽고 다시 사신 영, 곧 부활의 씨가 들어 있다. 그래서 우리도 장차 예수님과 같은 부활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그분의 창조물 중의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 1:18)
하나님은 아담이 사탄에게 속아 죽지 않는 신이 되기 위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자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 3:19) 하셨다. 이 말의 의미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흙으로 지어진 사람이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없다. 너는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고 그 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이식하여 사람들에게 영생을 주는 것이 창조 목표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상태는 하나님이 씨를 심으려고 해도 이미 다른 씨가 심겨져 있어 자신의 씨를 심을 수 없는 상태가 된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한다. 오이 씨를 심으면 오이가 나고 호박 씨를 심으면 호박이 난다. 그래서 예수님은 예수의 씨가 없는 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요 8:44)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에 사람은 예수의 씨를 심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를 심으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부활한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그것은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 24:15)
아담과 예수님의 근본적 차이는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여 이탈한 자라면 예수님은 죽기까지 자신의 위치를 지키신 분이다. 곧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한 사람 농사의 과정을 걸어가신 분이다.
그러면 어떻게 하나님이 정해주신 본래의 위치를 회복할 수 있는가? 궤도(軌道)를 이탈한 사람이 어떻게 하면 정상적인 길, 생명나무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가? 하나님은 궤도를 이탈한 인생이 정상적인 길로 들어서려면 반드시 불타는 칼을 통과해야 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이같이 하나님께서 그 남자를 쫓아내시고 에덴의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사방으로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道)을 지키게 하시니라.’(창3:24)
불타는 칼, 이것은 구약의 번제단이고 신약의 십자가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통과한 자만이 생명나무의 길로 들어설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죄가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통과해야 하는 것도 있지만 사람은 근원적으로 영생을 얻기 위해 십자가를 통과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 자신이 영인데 영이란 불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나는 자는 죄가 있건 없건 무조건 죽게 되어 있다. 하나님은 용광로 하나님이다. 어떠한 쇠도 용광로 안에 들어가 용해되어 재창조되듯이 흙으로 지어진 사람은 도자기가 가마에서 구워지듯이 용광로 하나님과 연합되어 돌(세라믹)이 되고 최종적으로 영원히 변치 않는 보석으로 재창조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의 운명을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도록 운명 지으셨다.
계룡산 토굴에서 소위 엄숙하고 경건한 모습으로 도 닦는 사람이 도사가 아니고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고 함께 다시 산 사람이 생명나무의 길에 들어 선 사람이고 참 도사(道士)이고 구도자(求道者)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