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의도

3.3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의 원리

올더스조에 2019. 2. 20. 21:02

3.3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의 원리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의 원리를 아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다. 사실 이 생명의 연합의 원리가 하나님께서 정한 십자가의 도라고 할수 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이 원리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이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 결혼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영-하나님과 육-사람이 한 몸이 되는 것이다.(22:17) 즉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이 되고 사람은 하나님의 몸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인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뭐든지 금 나와라 뚝딱하면 다 되는 것으로 안다. 그런데 그렇지 않다. 그렇게 할 수 있었다면 무슨 연고로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겠는가?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이것은 영적이건 육적이건 동일한 원리다. 예수님께서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4:4) 하신 이 말씀은 사람은 육적으로나 영적으로나 먹어야 산다는 것이며 사람에게는 육적인 생존을 위한 음식과 영적인 생존을 위한 두 종류의 음식이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있다. 사람은 자가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고 먹어야 사는 존재라는 것이다. 온 우주 안에서 자가 발전하여 스스로 존재하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고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먹을 것을 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내가 온 지면 위에 있는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속에 씨 맺는 나무의 열매를 가진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었노니 그것이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되리라.’(1:29)

어떤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사람이 죽지 않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왜 사람에게 먹을 것을 주셨겠는가? 또한 하나님은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후에도 여전히 육적인 생존을 위해 채소를 먹으라고 하신다.(3:18) 그러므로 창세기 3장의 선악과와 생명과는 영적인 생명을 위한 양식이라는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창세기 3장에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으면 그날 안에(in the day) 반드시 죽을 것이라고 하셨다.(2:17) 그런데 아담은 그날 죽지 않고 930살까지 살다가 죽었다. 만약에 이것을 육체의 사망에 연결시킨다면 하나님은 거짓말쟁이가 되고 만다. 성경은 사람을 사이에 두고 하나님과 사탄의 전쟁이다. 그런데 선악과와 생명과를 물질적으로 받아드리면 아주 우스운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예를 들어 영생은 하나님 자신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사람이 얻을 수 있는 것인데 무슨 설화에 나오는 것 같이 문자적인 열매를 따서 먹으면 영생을 얻는다고 한다면 하나님도 생명이고 생명나무의 열매도 생명이라는 곧 하나님이 두 분이 있다는 황당한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약성경이 자신에 대해 말하는 것이라고 하셨다.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5:39)

구약성경은 직접적으로 예수님을 언급하지 않고 대부분 상징과 예표로 기록되어 있는데 예수님은 오셔서 그러한 상징과 예표가 예수님 자신을 언급한다고 하신 것이다. 또한 바울도 출애굽기에 등장하는 반석과 유월절 어린양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고 있다.

‘.....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는데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느니라.’(고전 10:4)

‘......우리의 유월절 어린양 곧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희생물이 되셨느니라.’(고전 5:7)

구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긍정인 것들은 모두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든지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자신을 포도나무에 비유하셨듯이(15:5) 구약성경을 살펴보면 인격적인 존재를 나무로 대신 표현하고 있는데 특히 사탄, 왕 등을 나무로 인격화하여 표현하고 있다.

이처럼 영광과 위대함에서 네가 에덴의 나무들 중에 누구와 같으냐? 그러나 네가 에덴의 나무들과 함께 땅의 아랫부분으로 내려갈 것이요, 칼에 죽임을 당한 자들과 함께 할례 받지 않은 자들의 한가운데 누우리라. 이것은 파라오와 그의 모든 무리니라. 주 하나님이 말하노라, 하라.’(31:18)

내가 침상에서 본 내 머리 속의 환상들은 이러하니라. 내가 보니, 보라, 땅의 한가운데 한 나무가 있는데 그것의 높이가 심히 높더라. 그 나무가 자라서 강하게 되고 그것의 높이가 하늘에까지 닿아 그것의 모습이 온 땅의 끝까지 이르렀으며’(4:10-11)

이외에도 많은 관련 말씀이 있지만 지면 관계상 생략하기로 한다. 그러므로 에덴동산의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는 사탄과 예수 그리스도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지 문자적인 나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창세기 3장에서는 사탄을 뱀으로 표현하지만 이것이 문자적인 뱀이 아니라 사탄을 다르게 표현한 것임을 계시록 202절에서 알 수 있다.

마귀요 사탄인 그 용 곧 저 옛 뱀을 붙잡으니라. 그가 그를 붙잡아 천 년 동안 결박하여’(20:2)

그러므로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도 문자적인 나무가 아니라는 것은 너무도 명확하다. 우리는 앞에서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과의 관계적 생명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사망은 무엇인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육체가 살았든지 죽었든지 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으면 사망이고 연결되어 있으면 산 것이다. 전등에 전기가 끊어져 있으면 죽었다는 것이고 연결되어 있으면 살았다고 하는 것과 같은 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이것을 문자적으로 그대로 받아 들여 육체의 생명에 연결시킨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본질적인 지식이 없기 때문에 발생하는 오해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사망에 대해 말할 때 대부분 육체의 죽음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경우를 사망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 곧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결혼이란 어느 일방이 한쪽을 일방적으로 취하는 것이 아니다. 상호 대등한 관계 속에서 연합하는 것이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이 관계가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재현된다는 것이다.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취해야 하고, 하나님은 사람의 생명을 취함으로 완전한 한 몸으로서 생명의 연합을 이룬다는 것이다. 우리는 앞에서 생명은 먹어야 산다는 원리를 배웠다. 예를 들어 풀이 소가 되려면 풀이 소에 먹혀야 하고 소가 사람이 되려면 소가 사람에게 먹혀야 한다. 이것이 생명의 원리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어느 일방이 먹는 관계가 아니고 서로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연합된다는 것이다. 이게 있을 수 있는 일인가?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과의 연합(결혼)을 통해 이것을 실행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계시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려면 하나님을 먹어야 하고,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을 취하려면 사람을 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기 위해서는 하나님을 먹어야 하는데 이는 하나님이 죽어야 한다는 논리다. 그렇지 않은가? 내가 누구에게 내 자신의 생명을 준다는 것은 자신이 죽겠다는 의미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방법이 하나님이 육체로 오셔서 사람을 위해 죽으시는 방법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 ....’ (딤전 3:16)

이글을 처음 읽는 사람들은 무슨 불경스럽고 해괴 망측한 말인가 할 수 있을 것인데 사실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오셔서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 내 살은 참으로 양식이요 내 피는 참으로 음료이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느니라.’(6:54-56) 라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먹어야 예수라는 영원한 생명을 취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면 반대로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음식이 되는가의 문제이다. 이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레위기로 돌아가야 한다. 레위기에 보면 개역성경에서 제물로 번역한 하나님께 드려지는 다섯 가지 헌물(offering)’들이 나온다. 이 다섯 가지 헌물은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다섯 가지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물 중 음식헌물을 제외한 번제헌물, 화평헌물, 죄헌물, 범죄헌물 안에는 죄로 인한 희생물을 드리고 난 후 헌물을 드린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크게 희생물(sacrifice)과 헌물(offering)로 구분되는데 희생물은 죄와 관련된 것이고, 헌물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교제를 위해 드려지는 제물이다. 희생물은 피를 뿌려 속죄를 하고 헌물은 불에 태운다. 공통점은 둘 다 죽음으로 드려진다는 것이다. 이 의미는 사람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께 대하여 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이를 표현하는 것이 레위기 2장에 보면 오직 식물성 곡식으로 드려지는 음식헌물(the meat offering)’, 곧 소제가 나온다. 레위기에 나오는 제물 중 음식헌물은 유일하게 죄와 관계없이 드려지는 제물이다. 사람은 먹는 음식에 따라 자기 몸이 조성된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고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식물의 열매를 먹을 것으로 주셨고, 죄가 들어 온 후 동물성 음식이 허락되었다.(9:3) 이것은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 죄와 관계없는 피 흘림이 필요없는 식물성 헌물로 드려질 운명이었는데(2:21) 중간에 사탄의 방해로 죄가 들어와 죄를 속하기 위해 피 흘림이 필요한 동물성 희생물이 추가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의 운명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헌물로 창조되었기에 레위기에 나오는 다섯 가지 제물의 명칭을 모두 헌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제물은 불에 태워지는데 이 불은 하나님을 예표한다. 성경에서 하나님은 영이시며 이 영은 소멸시키는 불이라고 한다. 우리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시니라.’(12:29)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불의 혀같다고 하는 것이다.(2:3)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들이 모두 불에 태워지는 것은 불(하나님)께서 드려진 제물을 음식으로 드신다는 의미다.

제사장은 그것을 제단 위에서 태울지니 그것은 불로 예비하여 주께 드리는 헌물의 음식이니라’(3:11)

하나님께 드려지는 모든 제물이 하나님의 불에 태워진다는 의미는 기본적으로 사람은 하나님께 번제헌물(burnt offering)’로서 하나님의 음식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모든 제물의 기초는 번제헌물이고 다른 종류의 제물은 번제헌물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는 화평헌물(the peace offering)’을 살펴보자. 구약의 제사에서 제사장은 하나님을 대리하고 제물을 드리는 백성은 사람을 대표한다. 제사에서 다섯 가지 제물 중 번제헌물, 음식헌물, 죄헌물, 범법헌물은 사람의 입장에서 모두 일방적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이다. 모두 하나님을 예표하는 제사장이 일방적으로 받든지, 먹는다. 그런데 화평헌물(화목제)만 제사장과 제물을 드린 자가 함께 먹는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모두 그리스도를 먹는 것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그리스도를 먹음으로 생명이 연합되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다.

그래서 현재 그리스도인인 우리의 육체가 죽는 것은 죄로 인한 희생물로 죽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죄 때문에 죽는다고 하는 관념이 박힌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의 명칭이 모두 ‘00희생물이 되어야 하지만 성경은 죄와 관계없는 제물의 명칭인 ‘00헌물이라고 쓰고 있다. 원래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 속에 사람에게 죄는 없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죄라는 장애물이 들어온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성취하기 위해 예수님의 희생물 되심을 통해 죄라는 장애물을 제거하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일 우리가 어떤 사람들의 주장처럼 죄로 인해 죽는다고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속을 심각하게 훼손하는 것이며 그는 구원받은 사람이 아니다. 더구나 우리는 죄 값을 치루기 위한 희생물로서의 자격도 없다. 특히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서 죄가 없음에도 죽으셨다. 만약에 사람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면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지 않으셔야 한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필자의 이런 주장에 자신들의 논리가 부족하면 무조건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억지를 부린다. 상식과 논리가 통하지 않는 것은 맹신이지 합당한 믿음이 아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의미는 우리의 조상이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체를 가지셨으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니라.’(4:15)

또한 시편 8편에 보면 사람은 천사보다 조금 낮게 만들어 졌으나 피조물의 머리라고 말하고 있다.

주께서 그를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그에게 영광과 존귀로 관을 씌우셨나이다.’(8:5)

우리가 아는 바와 같이 천사는 영적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이 있고 죽지도 않지만 천사는 사람의 종으로 창조되었고 비록 사람은 천사보다 조금 낮게, 즉 연약하게 창조되었으나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창조되었고, 천사는 사람의 종으로 창조되었다. 시편 85절에서는 사람이 천사보다 낮게 창조된 면이 어떤 면에서 낮게 창조되었는지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지 않지만 히브리서 29절에 가면 시편 85절을 인용하면서 천사는 죽지 않는 반면 사람은 죽는다고 기록되어 있다.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2:9)

그러므로 사람이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다고 믿는 것은 잘 못된 믿음이다. 또 말 그대로 영생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죽지 않아야 한다. 영생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는다고 한다면 영생이란 말 자체가 말이 안 되는 논리이며, 특히 지금 우리의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란 말도 논리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이다. 천사는 비록 영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지만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기에 사형선고를 안 내린다. 죽지 않는 자에게 어떻게 사형선고를 내리는가? 사형선고는 죽을 수 있으니까 내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인 우리가 현재 죽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헌물로서 죽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죽는 희생물이 아니라 살아 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어 너희에게 간청하노니 너희는 너희 몸을 거룩하고 하나님께서 받으실 만한 살아 있는 희생물로 드리라. 그것이 너희의 합당한 섬김이니라.’(12:1)

나는 언젠가 어떤 설교자가 희생물이란 죽는 것인데 왜 살아있는 희생물이라고 하는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한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살아 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장차 자기의 죽음에 대해 희생물이 아닌 하나님께 드려지는 헌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딤후 4:6)

이러한 내용을 증명하는 성경 구절은 여러 군데 나와 있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위 말씀이 성경에서 하나님의 경륜을 가장 잘 표현하고 있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의미를 해석해 보면, 우리가 현재 육체를 입고 이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처럼 육체를 벗어버리고 신이 되고자 함이 아니고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예수님처럼 영적인 새로운 몸을 입고자 하는 것인데 이를 위해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이 육체가 생명이신 하나님께 음식으로 삼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죽음 안에서 연합이 된다는 것이다. 육체의 죽음이 없으면 새로운 생명으로의 전환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 아담이 이르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2:21-23)

위 말씀은 우리가 잘 아는 말씀인데 여기에 하나님의 깊은 경륜이 있다. 여기서 아담은 첫 번째는 사람을 대표하고, 두 번째는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이브는 부활생명, 곧 교회를 예표한다. 특히 이 말씀은 아담이 범죄하기 전의 말씀이다. 우리가 이 말씀을 죄라는 선입관을 배제하고 순수한 관점에서 보면 사람의 운명은 한 번 죽고 부활 생명, 곧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여기서 아담이 잠들었다라는 말은 원어로 죽었다는 의미이다. 부활생명은 말 그대로 죽고 다시 살아나는 것이다. 죽지 않고 어떻게 부활하는가? 두 번째로 예수님도 마찬가지로 죄와 관계없이 죽음을 통해 이브(교회)를 산출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사람과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이다. 이 운명을 벗어날 사람은 우주 안에 아무도 없다.

이 말씀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계시이다. 사람은 원래 죽지 않도록 창조되었는데 죄 때문에 사망이 왔다고 믿는 사람들은 무조건 이것을 사람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논리를 펼친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성경을 순수한 관점에서 보지 않고 자신의 선입관을 세워놓고 거기에다 하나님 말씀을 맞추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계시를 나의 생각을 버리고 순수하게 받아 드려야 한다. 우리의 죄가 없더라도 예수님은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는 죽으셔야 한다는 것이 성경의 진리다. 우리 또한 하나님께서 정해놓은 경륜의 과정인 부활생명을 얻으려면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우리의 죄 때문에만 예수님이 죽으셔야만 한다고 했을 때 우리가 죄를 범하지 않았다면 우리에게는 예수님이 필요 없다는 황당한 논리가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은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인데 이는 하나님께서 직접 주시는 것이 아니고 반드시 중간 연결자이신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주신다는 것이다. 미국 사람과 한국사람 사이에도 의사가 통하려면 통역자가 있어야 한다. 하물며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인 사람의 간격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크다.(55:8~9) 물과 기름도 연합되려면 중화제가 있어야 하듯이 모든 만물의 연합은 중간에 연결자가 있어야 한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뭐든지 금 나와라 뚝딱 하는 식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는 중재자가 필요한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 2:5)

우리는 죄가 있든 없든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그리스도라는 중재자를 통해 연결되는데 그것도 반드시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 연합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면서 왜 하필 십자가를 통해서만 생명을 주실까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는데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우리의 인간적 생각으로는 이것을 사망이라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은 생명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이신데 바로 그 영 안에서만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이 연합이 되기 때문이다. 영이란 의미는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육체를 가진 우리의 눈으로 보면 죽는 것이지만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영이 생명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은 상호 죽음 안에서 연합되는 것이다.

이것이 번제단, 곧 십자가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사람을 만나기 위해 지성소에서 나와 번제단으로 가셨고 사람으로서 세상에서 나와 번제단으로 가서 하나님을 만난 것이다. 번제단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이다. 예수님은 사람을 대표해서 두 가지 종류의 제물, 희생물헌물의 위치로서 하나님께 드려졌다. 희생물의 위치는 죄 값을 치루기 위한 법리적인 것이고, 헌물의 위치는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유기적으로 드려지는 것이다. 희생물은 법리적인 영역이고 헌물은 유기적인 영역인 것이다. 수학적으로 보면 예수님은 두 번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항상 구약에서 예수님의 죽음을 상징할 때 두 번의 죽음이 나온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할 때 홍해의 침례가 있었고, 그리고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요르단 강의 침례가 있었다.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후 광야에서 모세가 지팡이로 반석을 치자 물이 나오는 장면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상징하는데 이것도 두 번 있었다.

그런데 희생물은 오직 죄 없으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가능한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죽는 희생물이 아니고 살아 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하는 것이다.(12:1) 그리고 원래대로 사람이 유기적 영역으로 위치가 옮겨지면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사람의 근원적 위치인 헌물로서 역할은 그대로 수행되어야 하는 것이다.

희생물은 제단 주위에 피를 뿌려 대속하지만, 헌물은 불에 태우는데 불에 태운다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음식으로 드신다는 의미다. 곧 헌물이 번제헌물로 변화되는 것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생명의 연합을 위한 과정인 것이다.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죄가 있건 없건 육체가 한번은 죽고 부활하도록 운명 지어졌다. 즉 사람은 씨-하나님께 대하여 흙으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태어나고, 사탄도 영으로서 일종의 씨이기 때문에 사탄의 씨를 받으면 불의한 자의 부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24:15)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생명 농사의 과정은 사람의 본성에 속한 몸인 죽을 운명의 육체를 죽지 않을 운명인 영에 속한 몸으로 바꾸는 것이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반드시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으리로다.’(고전 15:53)

위 말씀에서 죽을 것으로 번역된 ‘mortal’죽을 운명이라는 의미고, 죽지 아니함으로 번역된 ‘immortality’죽지 아니할 운명이라는 의미이다. 운명(運命)이란 어떤 상황에서도 변경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으로 태어났으면 사람은 사람이지 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운명이란 이런 것이다. 위 말씀의 의미는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mortal)’에서 죽지 않을 운명(immortality)’으로 전환되도록 운명이 정해져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운명에는 두 갈래 길이 있는 것이다.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곧 하나님의 아들로 운명이 정해지느냐, 아니면 마귀의 자식으로 운명이 정해지느냐 그 차이라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운명은 처음에 죽을 운명에서 죽지 않을 운명으로 바뀌도록 정해져 있다. 그래서 반드시 한번은 육체가 죽어야 한다. 본성에 속한 것이 먼저고 영에 속한 것이 나중이다.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 ......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전 15:44~46)

위 말씀을 보면 사람은 죄인이건 의인이건 모든 사람은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는데 사람은 본성에 속한 몸을 입고 뿌려진 다음, 곧 죽은 다음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질 운명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본성에 속한 몸이 첫 번째고 그 뒤에 영에 속한 몸을 입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이렇게 분명하게 기록되어 있는데도 사람들은 단순하게 죄가 들어와 육신이 사망이 왔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육신의 사망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아담은 죄가 있건 없건 어차피 죽고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영적인 몸으로 바뀌어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아담에 대해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종류의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 위에도 사망이 군림하였는데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5:14)

모형(模型)은 실재(實在)가 아니다. 예를 들어 아파트 공사를 하기 전에 모델하우스를 짓는데 모델하우스는 모형이지 실재 살 집이 아니다. 실재 아파트가 지어지면 모델하우스는 없어지는 것이다. 아담은 죄를 지었기 때문에 모형이 된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었다. 그러므로 아담은 죄가 있건 없건 육체는 죽을 운명(mortality)의 몸으로 창조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인의 죽음을 아담이 잠자는 죽음을 통해 이브를 산출했듯이 죽는다라고 하지 않고 잠 잔다라고 하는 것이다.(9:24, 8:52, 11:11, 13:36, 고전 15:6) 우리가 밤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의 과정인 육체적 죽음과 부활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반면에 죽음이 없는 새 예루살렘에 가면 밤이 없는 것이다.

거기에는 밤이 없겠고 등잔불이나 햇빛이 그들에게 필요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빛을 주시기 때문이라. 그들이 영원무궁토록 통치하리로다.’(22:5)

지금까지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사람이 죄가 없더라도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 죽으셔야 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즉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 만나는 공통 지점이 있는데 그것은 죽음-영 안에서만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나무 의자와 사람이 연합되려면 어디서 연합되는가? 바로 상호 죽음 안에서, 곧 둘 다 불로 태워져 재가 되면 연합되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바로 불로 태워지는 죽음 안에서 연합된다. 예를 들어 쇠와 쇠를 연결하려면 불로 용접하든지, 용광로에 넣어 녹여서 연합한다. 곧 불-영 안에서 연합, 죽음 안에서 연합된다는 것이다. 흙도 마찬가지다. 흙을 빚어서 도자기를 만들 때 불로 구워서 연합을 시킨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 죄가 있건 없건 하나님을 만나서 죽지 않을 피조물은 없는 것이다. 용광로 안에 들어가면 어떤 쇠든 다 녹여져 새로운 쇠로 재생되는 것이다. 새로운 생명이 탄생하는 곳이 번제단-십자가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내가 죄가 없었다면 육체가 살아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었을 것이라는 낮은 관념을 버려야 한다. 우리는 죄가 있든 없든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서만 하나님께 나갈 수 있는 것이다. 즉 그리스도의 죽음은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창세 전에 정해져 있었다.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7~8)

여기서 보면 예수님의 죽음은 우리 인생이 죄가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죄가 들어오기 전에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이미 창세 전에 정해져 있었다는 것이다. 혹자들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아담이 범죄할 것을 미리 알고 정했다고 주장할 수 있겠으나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죽음이 없이는 우리는 영생을 얻을 수가 없는 것이다. 예수님을 우리가 먹어야 우리가 예수(생명)을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13:8)이라는 말이 있다. 대속을 위해 그리스도가 죽어야 한다는 관념을 가진 사람들은 무조건 그리스도의 죽음을 우리의 죄와 관련시킨다. 그러나 창세에 사람이 죄를 지었는가? 그렇지 않다. 이 말씀의 의미도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라는 관점에 보면 그리스도는 이미 창세로 부터 우리를 위해 죽임을 당해야, 곧 음식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없더라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서는 그분이 우리의 음식으로 먹히기 위해 죽으셔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오셔서 자신의 살과 피를 우리를 향하여 먹으라고 하시는 것이다. 물론 우리 또한 하나님께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음식이 되고 하나님이 우리의 음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께 우리가 음식헌물로 드려지는 것을 음식의 개념으로 죽음을 맛본다(taste death)’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사람의 아들이 자기 왕권을 가지고 오는 것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 하시니라.’(1:28)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진실을 말하노니, 여기 서 있는 사람들 중에는 죽음을 맛보기 전에 하나님의 왕국을 볼 자들도 더러 있느니라, 하시니라.’(9:27)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이제는 네가 마귀 들린 줄을 우리가 아노라. 아브라함과 대언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말하기를,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리라.’(8:52)

다만 예수님을 보노라.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려 하심이라.’(2:9)

죄가 들어오기 전의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은 사람이 생명을 얻기 위해 믿으라는 말이 없고 먹으라라고 하셨다. 그리고 사복음서에 보면 처음에는 믿으라라고 하다가 요한복음에 와서 결론적으로 먹으라는 말이 나온다. 사복음서는 마태복음에서 요한복음으로 갈수록 하나님의 계시가 점진적으로 발전되어진다. 그러면 사복음서에서 왜 처음부터 먹으라고 하지 않았을까? 그 당시 유대인들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먹으라고 하니까 이러므로 유대인들이 자기들끼리 다투며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6:52) 하였던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처음부터 먹으라고 하면 이해를 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의 수준을 고려해서 점진적으로 계시하시는 것이다.

요약하면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생명-영을 주시겠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반드시 죽음을 통해 영이 되셔야만 사람에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 15:45)

예수님이 살려 주는 영이 되셨다는 의미는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영이 되셨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의 이러한 섭리에 의해 예수님이 육체로 오셔서 죽음을 통해 사람을 위해 생명을 주는 영이 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