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3.2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군에서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부대와 상급부대와의 관계다. 우리부대가 상급부대로부터 어떤 지휘관계 하에 있느냐를 아는 것은 너무도 중요하다. 군에서는 크게 군령(軍令)과 군정(軍政)이라는 지휘관계가 있다. 군령은 작전에 관한 사항이고 군정은 작전을 제외한 인사와 군수에 관한 사항이다. 예를 들어 한국군의 전투부대는 전시에 연합사령관에게 작전통제, 곧 군령에 대한 통제를 받는다. 곧 작전에 관한 사항은 한미 연합사령관의 명령을 받고 군정에 관한 사항은 각군 총장의 명령을 받도록 되어 있다. 군에서는 이 명령체계를 유지하는 것이 그 부대의 생명이다. 그래서 군부대에서 자기부대 현황브리핑을 할 때 가장 먼저 자기부대의 임무와 지휘관계를 제시한다. 이 지휘체계가 자기 부대의 모든 행동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전시에 지휘관이 이 지휘체계를 무시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전시 군법으로 따지면 이것은 사형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적으로 말하면 이것을 죄(사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대기업 예하의 계열사들도 마찬가지이다. 자기 회사가 그룹 내에서 상위 회사와 어떤 관계에 있는지 아는 것은 기본이 아닌가? 그런데 안타깝게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사람의 위치에 대해 아는 사람이 거의 없는 것 같다. 이것은 상급부대와 관계에서 자기부대의 위치를 모르고 전쟁하는 개념없는 지휘관과 같은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아들로서 생명의 관계이고(눅3:37), 천사는 종으로서 법리적 관계이다(히1:14, 갈4:1~3).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이 지휘체계를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하며 그에 대한 죄 값이 사망인 것이다. 아담은 사탄에게 속아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하였는데 이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위치를 이탈하자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하시면서 인간의 근원적 위치를 물으신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것을 명확히 인식해야 개념있는 ‘그리스도의 좋은 군사’로서 영적 전쟁을 할 수 있다.(딤후 2:3)
위 그림에서 보듯이 사람은 원래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어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 생명의 관계이나 아담의 타락으로 율법의 세계로 이탈하므로 법리적 통치체제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법리적 통치체제하에서는 어떤 육체도 심판을 벗어 날 수 없다. 그래서 사망이다. 성경의 주제는 바로 하나님과의 유기적 생명의 통치체제에서 법리적 통치체제로 이탈한 사람을 원래의 통치체제로 회복-구속시킨다는 내용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롬 8:2)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죄(罪)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위치를 이탈하다’라는 의미이며, 구속(救贖)은 ‘원 위치’, 의(義)란 ‘바른 위치에 있다’라는 의미다. 구속이 되면 의로운 것이다. 세상이 말하는 의와는 전혀 다른 개념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에서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유기적인 생명의 통치체제에 대한 내용이다. 이 개념이 명확하지 않으면 생명의 왕국인 하나님의 왕국을 법리적 개념, 즉 도덕적 개념으로 바라볼 수 있다. 성경은 생명의 노선에 따라 기록된 책이지 법리적 도덕적 개념의 책이 아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이 개념을 머리 속에 확실히 인식하고 성경을 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은 하나님의 왕국을 이야기한다고 하나 결국은 세상 이야기를 하는 거와 같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생명이다. 그래서 모든 피조물의 영은 그 피조물의 생명을 대표한다. 피조물도 각기 영이 있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신이기에 피조될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이 하나님을 어떻게 창조하는가? 하나님은 한 분인데 그러면 하나님이 여럿이 존재하게 된다. 이것은 말이 안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인 우리를 향하여 하나님께로부터 ‘태어났다’라고 일관되게 말하는 것이다.(요 1:12) 물론 아담은 처음에 만들어진 존재였고 하나님의 아들로 불리었다. 그러나 아담은 거기서 머무를 존재가 아니었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원한 생명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야 할 존재였다.(창3:22) 육체를 가진 아담은 만들어진 아들에서 영적인 몸을 가진 아들로 다시 태어나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영’ 만을 피조 될 수 없는 영원한 생명이라고 한다. 통상적으로 사람들은 육체가 죽지만 않으면 ‘영원한 생명’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비록 천사는 죽지 않지만 피조된 영을 가지고 있기에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단지 각각의 피조물은 피조된 영을 가지고 있고, 이 영이 그 피조물의 생명을 대표한다. 그래서 영이 없는 피조물은 죽었다고 하는 것이다.
‘영이 없는 몸이 죽은 것 같이 행위 없는 믿음도 죽었느니라.’(약 2:26)
만물은 생물이든 기계든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따른다. 하나님이 삼위일체이듯이 사람도 영, 혼, 몸의 삼위일체이고 기계도 같은 형상을 따른다. 예를 들어 자동차를 보면 자동차의 기름은 영을 상징하고 내부기계는 혼을 상징하고 외부는 몸을 싱징한다. 그래서 자동차도 영을 상징하는 기름이 없으면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육체를 가진 피조물은 자가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라 외부의 공급을 받아야만 살 수 있는 존재다. 사람이 죽지 않을려면 천사와 같은 영적인 몸으로 변화해야 가능한 것이다.(눅 20:36)
지금 현재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생명(씨)와 몸(땅)의 관계이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도 이것은 명확하게 나와 있다. 어떤 사람들의 주장과 같이 사람은 원래 영생하는 존재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다.(창 3:22)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씨를 받아 영생하는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할 존재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씨를 뿌려 사람 농사를 짓는 분이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하나님의 건물이니라.’(고전 3:9)
씨는 땅속에 들어가 죽어야만 열매를 맺는다.(요12:24) 이 씨는 하나님의 생명을 상징한다. 씨는 땅 속에 들어가 죽은 다음 자신보다 20만 배의 무거운 중력을 뚫고 싹이 지면으로 올라온다고 한다. 씨는 외부적 환경만 맞는다면 썩지 않는다. 그래서 수 천년 전의 씨도 현대에 와서 심어도 싹을 발아 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씨도 땅 속에 들어가 죽어야만 생명을 발아시킬 수 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우리에게 생명(씨)를 주셨고, 사람으로서 처음으로 하나님의 씨를 이식 받아 죽은 자 가운데 일어나신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그래서 사람 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이고 장차 우리도 그분의 뒤를 이어 같은 종류의 열매들이 될 것이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창조물 가운데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약 1:18)
아담은 처음에 만들어진 존재로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하는 존재로 바뀌어져야 할 존재였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의 운명적 관계는 처음에 씨와 땅의 관계, 남편과 아내의 관계라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에 의한 주인과 종의 관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씨를 받아드려 아들로 태어나는 생명의 관계다. 처음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난다고 할 때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 하고, 또 하나님과의 연합(결혼)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남편과 아내의 관계이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이 음과 양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바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롬 1:20)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 생명의 관계, 곧 가족관계이다.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엡 3:15)
사람은 죄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하는 존재가 아니라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을 위해 거듭나야 할 존재이다. 그래서 사람은 반드시 흙으로 만들어 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천사는 영적 존재로서 하나님과 관계에서 생명의 관계가 아닌 종의 관계이기 때문에 1차적 창조로 끝나지만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져 하나님의 씨를 받아 들여 육체가 죽은 다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영적인 존재로 다시 태어나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전 15:44 ~46)
사람은 본성에 속한 몸, 즉 육체는 뿌려지고(죽고) 영에 속한 몸으로 부활할 존재이다. 사람이 본성에 속한 육체로 만들어진 것은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육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죄와 관계없이 본성에 속한 몸으로 만들어졌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와 관계없이 원래부터 본성에 속한 육체로 만들어진 다음 영적인 육체로 바뀌어질 운명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사망이란 육체의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생명이 예수님이듯이 사망은 사탄을 가리키는 말이다. 우리가 예수라는 생명의 씨를 받으면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이라는 사망의 씨를 받은 불의한 자의 부활로 부활하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 24:15)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이 진리를 확증하신다.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요3:3) 하셨다. 이것을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죄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말하는데 그렇지 않다. 예수님은 이어서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요3:5~6) 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1차적으로 물(육신)으로 태어난 다음 2차적으로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나는 것’이라고 정의해 주고 계시는 것이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요3:6) 라는 의미는 육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도 살과 피, 곧 육신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우리가 살과 피, 곧 육신으로 지음 받은 것은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육신이 된 것이 아니고 원래부터 육신으로 지음받은 것이다. 아담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처음부터 육신으로 지음 받았다. 물고기가 물 속에 살려면 그 세계에 맞는 몸을 입어야 한다. 새가 공중에 살려면 공중에 살도록 적합한 몸을 입어야 한다.(고전 15:39~40) 하나님의 왕국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에 그 세계에 합당한 몸, 곧 영적인 몸을 입어야 살 수 있는 것이다. 육에서 난 것이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고 영에서 난 것이 하나님의 최종목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죄인이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이 없다. 우리가 육신으로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처음부터 육신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육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죽고 다시 산다는 것이다.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육신이 죽고 다시 태어나도록 운명 지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