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 삯은 사망(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롬 6:23)
For the wages of sin is death; but the gift of God is eternal life through Jesus Christ our Lord(Rom 6:23)
위 말씀에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의미는 육체의 사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위 말씀은 앞 구절은 사망을 말하고 접속사 그러나(But)을 사용하면서 뒷 구절은 생명을 말하고 있다. 즉, 사망의 길과 생의 길이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생명과 사망을 말할 때는 우리의 육체의 생명과 사망을 두고하는 말이 거의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육체가 죽지 않고 살아 볼까하는 아담의 욕망 때문에 늘 사망이라는 말을 육체의 사망에 결부시킨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어차피 흙으로 만들어져 한번은 육체가 뿌려진 다음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 지도록 운명지어졌다.
‘본성에 속한 몸으로 뿌려지고 영에 속한 몸으로 일으켜지나니 본성에 속한 몸이 있고 영에 속한 몸이 있느니라.’고전 15:44)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전 15:46)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서 나는 것은 먹지 말라.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하였을 때 '그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는 말은 육체가 죽는다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말이다. 만약에 이 말이 육체의 죽음을 가리키는 말이라면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바로 그날 반드시 죽어야 했다. 그러나 아담은 930살을 살다가 죽었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전등에 전기가 연결되어 들어오는 거와 같은 이치다. 세상에서도 전선에 전기 연결이 안되면 우리도 그 전선이 죽었다고 하듯이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이러한 개념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은 창조될수 없는 것이고 우리가 통상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의미는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의미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관계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고 사망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고 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창조될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기위해 사람을 흙으로 만들 수밖에 없고, 사람도 영원한 생명을 가진 몸으로 변화되려면 육체가 반드시 한번은 죽고 부활의 몸을 바뀌어 져야 한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우리의 육체의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길, 곧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에 이르는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농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 흙- 사람에게 생명-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놓은 인간의 운명을 무시하고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간 죽지 않는 신이 된다는 속임수에 넘어가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였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에게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창3:19) 하셨다.
이말씀의 의미는 사람은 무엇을 해도 흙이지 결코 신이될 수 없다는 의미다. 쉽게 얘기 하면 흙인 아담이 죽지 않는 신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먹었지만 사람의 본질은 흙이기 때문에 결국 육체는 죽는다는 의미다. 이것을 사람들은 오해서 사람이 원래 영생하게 되어있었는데 아담이 저주를 받아 육체가 죽게 되었다고 말한다. 사람들은 죄만 없으면 영생한다고 착각한다. 그러면 죄없으신 예수님은 왜 십자가에서 죽었나, 사람은 죄가 없더라고 죽게되어 있다. 살과 피를 가진 현재의 육체로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수가 없다.
'형제들아, 이제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 15:50)
사람은 죄가 있기 전 부터 살과 피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죄가 있는 없든 영적인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그 왕국에 합당한 영적인 몸을 입어야 한다. 죄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사탄이 뿌려놓은 하나의 장애물에 불과한 것이지, 죄만 제거하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가 완성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잘 살펴보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는 우리가 죄가 없더라도 죽으셔야했다. 즉 사람은 죄가 있든 없든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생명을 얻으려면 무조건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 드려야한다. 왜냐하면 그분이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영-씨가 되셔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반드시 죽으시고 부활하셔야한다. 그러나 사람이 죄가 없다면 예수님이 사람을 위해 죽을 명분도 부족하고 사람도 예수님의 죽음을 나의 죽음으로 받아드릴 명분도 부족하다.
그래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에 의해 사탄으로 인해 세상에 죄가 들어오고 인류에게 율법이 주어지고 이 율법을 통해 인류를 생명이신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게 했다는 것이 바울의 해석이다.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 3:24)
다시한번 말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육체의 생명과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생명에 이르는 과정이 있고 사망에 이르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생명이란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명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개념이고 사탄도 자신의 사망의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개념이다.
그래서 이것을 성경은 생명과 사망을 말할 때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 있다고 말한다.
‘너는 또 이 백성에게 이르기를, 주가 이같이 말하노라. 보라, 내가 너희 앞에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을 두었노라.’(렘 21:8)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신 목적은 사람을 흙으로 만들고 자기 자신, 곧 영원한 생명을 사람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곧 흙-사람에게 생명-씨를 뿌리겠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을 '생명'이라고 하는 말은 씨로 오셨다는 의미다.
'이제 그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하신 것인데 그분께서 여럿을 가리키며, 씨들에게, 하지 아니하시고 하나를 가리키며, 네 씨에게, 하시나니 이 씨는 그리스도시니라.'(갈 3:16)
그리고 성경에 의하면 '생명'을 다른 말로 하면 '씨'고 또 '영'이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최종목적은 예수 그리스도의 '영'을 사람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 15:45)
'이제 주께서는 그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거기에는 자유함이 있느니라.'(고후 3:17)
주님이 육체로 계시면 우리에게 생명, 곧 영을 줄 수가 없다. 반드시 죽으심을 통해 영이 되셔야만 우리에게 영-씨를 줄 수가 있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은 흙-사람에게 생명-씨, 곧 영을 주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간단하게 요약하면 육체로 오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섭리에 의해 죽으시고 영-씨가 되시는 과정을 기록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성육신과 죽으심, 그리고 부활의 과정을 거친 그 영, 곧 그 씨가 우리에게 주어져야 우리도 똑 같은 열매를 얻는다는 것이다. 수박씨를 심어야 수박이라는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부활의 영-씨가 우리에게 심겨져야 우리도 부활의 열매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사람 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바로 이 부활의 씨를 심어 첫번째로 얻은 열매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육체의 생명과 사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라 사람 농사를 짓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생명의 씨를 뿌리고 열매-아들을 거두는 과정이 있고, 사탄도 자신의 사망의 씨를 뿌리고 열매-자식을 거두는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요 11:25)에서 예수님은 부활이고 생명이라고 했는데도 육체가 죽으셨다.
그리고 ‘또한 그분께서 범법과 죄들 가운데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엡 2:1)에서도 우리가 언제 육체가 죽었던 적이 있고 다시 살아난 적이 있는가? 그러니까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우리의 육체의 사망과 생명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성경에서 생명은 예수님이시다. 그러면 사망은 누구인가? 당연히 사탄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라는 생명의 씨를 받아 들이면 생명의 열매-아들로, 사탄이라는 사망의 씨를 받아 들이면 사망의 열매-아들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 24:15)
그러므로 로마서 6장 23절의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분명히 육체의 사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로마서 6장 23절 말씀은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여기서 ‘죄의 삯(wage)은 사망’이라 말을 문자적으로 받아드린다면 큰 모순이 생긴다. 왜냐하면 우리가 죽는 것이 죄 때문에 죽는다고 한다면 우리는 죄 값을 우리 스스로 지불 완료하는 것이기 때문에 죄가 없어지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도 필요없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아무리 죽어보았자 우리의 죽음으로는 우리의 죄가 용서되지 않는다. 로마서 6장 23절 말씀은 문자적으로 적용한다면 유일하게 예수님에만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만이 우리의 죄 값을 지불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죽음은 로마서 6장 23절 말씀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 레위기에 정하신 제사법 중에 ‘희생물(sacrifice)’에 근거한 것이다. 레위기에서 특별히 희생물을 제단 주위에 피를 뿌려 죄를 속하게 하는 원칙은 하나님께서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느니라.’(레 17:11) 라는 말씀에 근거한 것이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씀에 근거하여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죄인인 나의 죄를 대속하려면 내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아닌 제 3자의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죄 없는 자의 피가 필요하다. 죄인인 우리의 피는 아무리 흘려보았자 소용이 없다.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하려면 물에 빠지지 않은 자가 필요하고 죄인을 구원하려면 죄 없는 자가 필요한 것이다. 내가 죄로 인해 육체가 죽는다면 나의 죄를 대속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피를 욕되게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영, 혼, 몸의 전인격적으로 구원하였다. 영과 혼만 구원하고 몸이 죄 때문에 죽는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은 완성이 안된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6장 23절 말씀을 문자적으로 적용하여 죄인인 내가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죽는다’라고 하면 내 죄는 없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속이 필요없다는 모순이 생기기에 말이 안되는 것이다. 다시한번 로마서 6장 23절을 말씀을 보자.
‘죄의 삯은 사망이나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니라.’(롬 6:23)
위 말씀을 인용할 때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의 삯은 사망' 이라는 앞 구절만 인용하고 뒷 구절은 인용하지 않은 채 죄 때문에 육체적 죽음이 오는 것 처럼 말한다. 앞 구절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적용하면서 뒷 구절 '하나님의 선물은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통해 얻는 영원한 생명'이라는 말은 어찌하여 문자적으로 적용하지 않는가? 그들의 논리라면 예수님을 믿은 우리는 육체가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야 되지 않는가? 그러므로 로마서 6장 23절 말씀 전체 문맥을 보면 이것은 '사망의 길과 생명의 길'을 접속사 but을 사용하면서 상반되는 두 길을 대조법으로 말하는 것이지 육체의 사망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즉, 아담의 죄로 인해 사망의 길에 들어왔으나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생명의 길로 들어왔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의 문제점은 창세기 2장 17절에서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이것을 먹으면 네가 그날에 반드시 네가 죽으리라'는 말씀을 육체의 사망에 둠으로서 성경의 전체적인 계시를 가리고 있다는 것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마지막 단추까지 잘 끼울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