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 정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국가 정책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태도
그리스도인들은 국가 정책에 대해 어떤 마음과 태도를 가져야 할까? 또 그리스도인이 국가 지도자 또는 공직자로서 어떤 정책을 결정을 할 때 무엇을 기준으로 해야 할까? 어떤 그리스도인들과 대화하다보면 북한에 대한 우리의 대북정책을 두고 자신의 정치적 성향에 따라 호불호가 갈리는 것을 본다.
1. 외교적 문제에 대한 성경의 관점
우선 국가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 국내 문제와 국제 문제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도덕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면 된다고 생각된다. 예를 들어 동성애 문제에 대하여 결정할 필요가 있을 때는 당연히 성경은 동성애를 죄악시 하기 때문에 동성애에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여야 한다. 이러한 도덕적인 문제는 국내나 국가 간의 문제나 동일한 결정을 하면 될 것이다. 문제는 국가 안보에 관한 문제이다. 예를 들어 북한이 핵을 개발하여 핵을 가지고 남한을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다.
그러면 성경은 어떤 태도를 취하고 있는가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니의 아들 선견자 예후가 여호사밧 왕을 맞으러 나가서 그에게 이르되, 왕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돕고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셔야 하겠나이까? 그러므로 주 앞으로부터 진노가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 19:2)
위 말씀은 이스라엘의 남북왕조시대에 일어났던 일로 지금의 우리나라 상황과 매우 유사하다. 이 말씀의 배경은 당시 남왕국 선견자 예후가 남왕국 여호사밧 왕이 하나님을 대적하는 북왕국 왕 아합을 도와주자 책망하면서 했던 말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경건치 아니한 자와 주를 미워하는 자’는 북왕국 아합 왕을 가리킨다.
북왕국 아합 왕은 백성에게 바알과 아세라를 숭배하게 했다. 이것이 바로 그가 하나님을 미워한 증거이다. 그런데 여호사밧 왕은 이러한 아합 왕과 연혼(連婚)하고 남북 화해를 도모하고자 했으며 더 나아가 군사 동맹을 맺고 길르앗 라못 전투에 까지 참가하였던 것이다. 이를 두고 선견자 예후는 여호사밧 왕에게 ‘왕이 경건치 아니한 자들을 돕고 주를 미워하는 자들을 사랑하셔야 하겠나이까?라는 신앙 윤리적인 문제를 제기했다. 사도 바울도 ’너희는 믿지 않는 자들과 더불어 공평하지 않게 멍에를 같이 메지 말라. 의와 불의가 어찌 사귀겠느냐? 빛과 어둠이 어찌 친교를 나누겠느냐?‘(고후 6:14) 고 했다. 한편 이런 정신은 ’너희 원수들을 사랑하며 너희를 저주하는 자들을 축복하고 너희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선을 행하며 악의를 품고 너희를 다루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들을 위해 기도하라.‘(마 5:44) 라는 예수의 가르침과 비교할 때 서로 모순되는 듯하다. 그러나 이런 관찰은 피상적인 살핌에 불과하다. 우리가 유의할 점은 마음의 태도 문제와 악행에 적극 가담하는 행동의 문제를 혼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원수를 사랑하며 핍박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것은 마음의 태도 문제이지 원수의 악행에 동조 가담하는 행동의 문제와는 다른 것이다. 여호사밧에 대한 예후의 책망은 여호와 하나님을 미워하는 자의 일에 적극 가담한 실책과 관련된 것이었다. 여호사밧이 같은 민족인 아합 왕과 북왕국에 대해 개인적인 연민을 품을 수 있었을지라도 그들과 행동을 같이 해서는 안 되는 것었다. 시편 기자의 심정처럼 주를 미워하는 자에 대해 ’내가 그들을 완전한 미움으로 미워하오며 그들을 나의 원수로 여기나이다.‘(시139:22) 하는 자세가 그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그러면 현재의 북한 정권은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정권인가 아니면 미워하는 정권인가 하는 것이다. 모두가 알다시피 북한 정권은 하나님의 백성을 핍박하는 자들이다. 북한 정권치하에서는 그리스도인으로서는 드러내놓고 살 수가 없다. 지금까 수 많은 하나님의 백성이 순교를 하였다. 그러면 답은 명확하다. 저들은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이고 하나님의 원수인 것이다. 현재 우리나라 정부가 취하고 있는 정책은 북한 정권은 우리의 적이고 북한 주민은 포용의 대상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대단히 성경적인 것이다. 우리 또한 이러한 관점을 가지고 북한정권과 북한 주민을 분리하여 대하면 된다고 생각된다. 성경에 의하면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북한 정권을 원수로 여겨야 하는 것이다.(시 139:22)
그런데 어떻게 그리스도인들이 북한 정권의 의도에 찬성할 수 있는가, 찬성할 수 없는 것이다. 또한 남한의 좌파 정권이 남왕조 여호사밧 왕과 같이 하나님께서 미워하는 자와 함께 멍에를 같이 멘다면 바로 그 왕에게 하나님의 진노가 따른다는 것이 성경 말씀이다.
‘그러므로 주 앞으로부터 진노가 왕에게 임하리이다.’(대하 19:2)
2, 도덕과 생명의 문제가 부딪칠 때 성경의 관점
우리는 통상 유교적 관념과 도덕적 관념 때문에 생명보다 도덕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임진왜란 때 이런 일화가 있었다고 한다. 강화도와 김포사이에 염화강이 있는데 이때 배를 타고 강화도로 도망치려는 여인들이 있었다고 한다. 이것을 왜군들이 조선 여인들의 손목을 잡고 끌어내리려고 하니 손목을 한번 잡혔던 여인들이 자기 몸이 더렵혀졌다며 마구 강물로 투신하여 자살 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은 어떤가? 유다의 며느리 다말은 일찍 남편이 죽어 아들이 없었다. 유대인들의 관습으로는 그 당시 아들이 없으면 상속재산이 없어 죽은 목숨과 같았다. 그래서 다말은 창녀로 위장하여 시아버지와 관계하여 아들을 낳았다. 아들을 낳았다는 말은 생명을 이어갔다는 의미다. 가나안 기생 라합은 자국을 배반하고 이스라엘 편을 들어 생명을 이어갔다. 이방여인 룻은 남편이 죽자 시어머니를 따라 유대로 넘어와 보아스에게로 들어가 아들을 낳아 상속, 곧 생명을 이어갔다. 우리아의 아내였던 밧세바는 다윗 왕이 부르자 살기 위해 굴복하고 남편을 버리고 다윗으로부터 아들을 낳았다. 율법적인 관점에서 보면 이들은 근친 상간자, 조국을 배반한 자, 지조와 남편을 버린 여자로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지탄받아 마땅할 여자들이다. 그런데 성경은 이들을 향해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들은 예수님의 계보에서 예수님의 조상들이 되었다.
이 세상에서 생명보다 귀한 것은 없다. 국가간의 문제에 있어서 생명, 곧 국가 안보가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왕국 백성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우리는 세상왕국에서 일을 하고 먹고 산다. 내가 현실적으로 살고 있는 세상왕국이 평안해야만 그리스도인인 나도 이 땅에 사는 동안 평화로운 삶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왕들과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것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을 따르며 정직한 가운데 조용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고자 함이라.’(딤전 2:2)
물론 어떤 이들은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고난을 받고 사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인만 고난을 받고 살까, 그렇지 않다, 어차피 인생으로 태어나면 아담 안에서는 모든 이들이 고난을 받고 산다. 고난이 온다면 당연히 그 고난도 하나님의 뜻이 있겠지만 이왕이면 평안히 주님을 섬기며 사는 것도 하나님의 복이다. 성경은 어느 한 구절만 보고 치우치면 안된다. 성경은 어느 구절에서는 결혼하라고 되어 있지만 어떤 구절에서는 결혼하지 말라고 되어 있다. 그 상황에 맞게 살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 곧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인격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 문자적인 기계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다. 이렇게 되면 생명없는 바리새인이 돼서 결국 성경대로 예수님마저도 죽이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도 어떤 사람은 평안히 살수도 있고 또 어떤 사람은 고난 가운데서 감사하면서 살 수 있는 것이다. 정해진 것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