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과 은혜
율법과 은혜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은혜를 잘 구분하지 못한다. 사실 율법과 은혜라기 보다는 지식과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 더 맞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흔히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예수님이 우리 인생들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지 않으셔도 될 수 있었을텐데 라고 단순하게 생각할 수 있다. 또 어떤 이들은 성경이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하니까 아담이 죄를 짓지 않았더라면 사람은 죽지 않고 영원히 살 수 있었을 건데 왜 아담 죄를 지어 사람에게 죽음이 오고 이렇게 힘든 생활을 하게 할까 라는 원망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전하는 복음이라는 것이 단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죽었으니 ‘예수님을 믿으라’라고 단순하게 말한다. 그런데 과연 전능하시며 우리의 인간의 생각으로는 헤아릴수 없는 깊고 깊은 하나님께서 단순하게 그렇게 하셨을까?
1.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
그러면 하나님은 인간을 왜 창조하셨는가? ‘곧 내 이름으로 불리는 모든 자라. 내가 내 영광을 위하여 그를 창조하고 그를 지었으며 참으로 내가 그를 만들었느니라.’(사43:7)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창조되었다. 곧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 사람이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표현하려면 하나님과 한 생명, 한 마음이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천사도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으로, 곧 하나님의 아들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야 한다. 이를 위해 사람은 반드시 흙으로 만들어져서 하나님의 생명-씨를 받아 다시한번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천사보다 조금 낮게 흙으로 만들어져서 반드시 한번은 죽고 다시 부활의 몸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창조한 다음 자신의 생명을 주어서 사람이 부활의 영적인 몸을 입고 하나님의 대신하도록 하기 위해 사람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2. 그러면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가?
우리는 흔히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우리가 하나님의 생명을 받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나무의자와 사람이 연합되는 것보다 어려운 것이다. 만물은 저절로 연합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물과 기름도 연합되려면 중화제가 있어야 하고 원자도 양전자와 음전자가 있는데 중간에 중성자가 연결작용을 하고 있다. 만물이 다 이런 원리에 의해 연결된다. 저절로 연결되는 것은 없다. 모든 만물은 연결되는 중간 지점이 있는데 그 지점은 서로가 교집합 되는 공통부분에서 연결된다는 것이다. 이 부분이 사실 생명이 연결되는 지점이다. 하나님은 영이신데 영이라는 지점만이 생명을 준다. 그래서 비록 천사는 하나님의 영을 가진 피조물은 아니지만 영적인 피조물로서 죽지 않는다. 성경에서 영은 바람, 기름, 불, 또는 물로 예표된다. 그래서 지금 지구상에서 에너지를 주는 물질은 바람, 물, 기름, 불이다. 바로 이것이 영-생명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람도 영이 되어야만 영이신 하나님과 연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이 되려면 반드시 죽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생명의 원리를 먹고 먹히는 관계로 설명하고 있다. 사실 모든 생물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생태계의 원리를 보면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에 참여하려면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에 먹힘으로 높은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풀은 소에 먹혀 소가 되고 소는 사람에 먹혀 사람의 생명이 참여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것을 성경은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5:4) 라고 하는 것이다. 즉 사람은 근원적으로 죄가 없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음식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레2:1)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죽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에게 준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사람에게 주는 것이니까 사람을 위해 하나님께서 사람의 음식헌물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죽지 않는 하나님이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을 어떻게 해결하셨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셔서 사람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신비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성품의 신비는 논쟁의 여지가 없이 위대하도다.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시고...’(딤전3:16)
예수님은 육체로 오셔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있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키리라.’(요6:54)
우리는 통상 예수님을 ‘믿는다’라는 말에 익숙해 있지만 사실 창세기에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하셨지 믿으라고 하지 않으셨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처음에는 믿으라고 하시다가 복음의 완성판인 요한복음에 와서는 자신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생명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예수님께서도 처음부터 사람들에게 자신을 먹으라고 하면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점진적으로 계시가 발전함에 따라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자신을 먹으라고 하신 것이다.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위한 제물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도 사람을 위한 제물이 되셨다는 것이다. 이 과정이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이다. 어느 일방이 한쪽을 먹는 것이 아니고 먹고 먹히는 관계에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의 생명의 양식이 되고 사람은 하나님의 양식-음식헌물이 되는 것이다. 이 과정이 완전한 한몸으로서의 연합, 결혼을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아담과 이브의 연합을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엡5:31-32)
3. 생명의 연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이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이라’.(요10:10)
이를 위해 우리는 대속물이신 예수님을 생명의 빵으로, 음료로 먹어야 한다. 예수님의 다른 지점을 우리가 먹을 수 없다. 예수님의 오병이어의 기적, 바람과 바다를 잠잠한 기적, 죽은 자를 살린 지점을 우리가 먹을 수 없다. 그러나 그분의 죽으심은 우리가 먹을 수 있지 않은가?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이 곧 생명의 나무의 열매다. 그분의 죽으심은 그분의 인격의 열매다. 우리는 나무를 먹지 않고 열매를 먹는다. 그분의 행하심은 나무다. 그것은 우리가 먹을 수 없다. 오직 그분의 죽으심만 우리가 먹을 수 있다.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는 하나가 되는 것이다. 그분의 죽으심만이 우리와의 교집합, 공통지점이다.
사람들은 죄가 없다면 자신이 하나님과 연결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29) 우리가 철이라면 하나님은 용광로다. 용광로에 들어가서 녹지 않을 철은 아무것도 없는 것이다. 좋은 쇠는 나쁜 쇠든 다 녹을 수 밖에 없다. 이것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진다고 표현한 것이다.(고후5:4) 쇠는 용광로에 들어가 강한 열에 의해 다른 물질로, 곧 영원한 보석, 곧 부활의 몸으로 변화되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생명을 얻는 과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번제단에서 하나님으로서는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서, 그리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사람으로서 헌물로 드려진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사람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제물이 되신 것이다. 이 지점은 오직 십자가이다. 그래서 항상 희생물과 헌물은 같이 따라 다니는 것이다.
‘그것은 태우는 희생물이요,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리는 헌물이니라.’(레1:17)
우리는 통상 죄가 없으면 우리가 직접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하나님과 우리 사람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 보다 크다. 그래서 우리는 죄가 없다 하더라고 반드시 연결자가 필요한 것이다. 그것도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서만 연결이 가능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중화제, 곧 생명의 연결자 안에서 하나님과 연결되는 것이지 우리 스스로는 연결될 수 없는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 2:5)
즉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중재자가 필요하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과 연합될 수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연결되는 것이다. 만물이 다 그렇다. 두 존재가 저절로 연결되는 것은 없다. 두 존재가 연결되려면 공통지점에서만 연결된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결되는 지점은 죽음, 곧 영안에서만 연결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사람을 위해서는 대속물이 되셨고, 하나님을 위해서는 헌물이 되셨다. 하나님의 대속물 되심을 성경은 ‘하나님의 교회 곧 그분께서 자신의 피로 사신 교회를 먹이게 하셨느니라.’(행20:28)라고 한다.
우리는 늘 죄라는 문제 때문에 내가 죄가 없다면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 또한 예수님은 우리가 죄가 없다 하더라도 우리의 생명이 되려면 우리를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어야 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은 사탄을 이용하여 사람으로 하여금 타락하게 하였고 십자가에서 사람을 위해 대속물이 되셨고 하나님을 위해 헌물이 되신 것이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4. 율법은 왜 주어졌는가?
물론 율법은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주어졌지만 궁극적으로 율법은 지키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결자이신 그리스도께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졌다. 즉 인류로 하여금 율법을 지킬 수 없는 절망감에 빠지게 하여 구원자를 찾도록 하기 위해 율법이 주어졌다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에 속한 자들은 다 저주 아래 있나니...’(갈3:10)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 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 함이라.’(갈3:24)
5. 율법은 왜 폐기될 수 밖에 없는가?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은 지식이기 때문에 아무리 열심히 지켜도 사람의 입장에서는 절망감에 빠지게 되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이 말씀을 간과하는데 가장 큰 율법의 단점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인 하나님의 생명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있었으리라.(갈3:21)
원숭이가 아무리 사람 흉내를 내고 사람처럼 행동을 해도 사람의 생명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율법이 그렇다는 것이다. 아무리 열심히 지켜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생명은 행위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신 것이다.
6. 그러므로 신약성도들은 생명을 줄 수 없는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이다.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서신인데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체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후3:3)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고후3:6)
‘우리를 붙들던 것 안에서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율법에서 구출되었나니 이것은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고 글자의 낡은 것 안에서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라.’(롬7:6)
율법과 은혜, 이것은 군대의 지휘관이 작전을 한다면 작전의 단계화와 같은 개념이다. 1단계에는 보병으로 공격했다면 도저히 보병으로는 목표를 달성할 수 없기에 2단계 작전간에는 다른 수단으로 공격을 해서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율법과 은혜, 곧 지식과 생명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큰 것이다. 율법이 땅에 속한 것이라면 은혜는 하늘에 속한 것이다. 완전히 차원이 다른 것이다. 군대로 말하면 보병과 공군의 차이만큼 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