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들로 인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고전15:29)
죽은 자들로 인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
그렇지 아니하여 만일 죽은 자들이 결코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죽은 자들로 인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할진대 그들이 어찌하여 죽은 자들로 인하여 침례를 받느냐?(고전15:29) Else what shall they do which are baptized for the dead, if the dead rise not at all? why are they then baptized for the dead?
위 구절은 일반적으로 난해구절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인 우리의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의 상식과 기대 속에서 쓰여진 지식의 세계가 아니고 하늘에 속한 생명의 세계를 기록한 책이다. 생명의 세계란 씨를 땅에 뿌려서 열매를 거두는 일련의 과정이다. 씨-하나님과 흙-사람에 대한 세계를 기록한 책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위 말씀에 앞서 먼저 부활이 없다는 사람들의 주장에 반박하면서 죽은 자들의 부활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정해져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죽은 자들의 부활의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일어나지 않으셨다는 것이다.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지 아니하셨느니라.(고전15:13)
바울은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또는 죄가 없기 때문에 부활하셨다고 말하지 않고 죽은 자들의 부활이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정해져 있기 때문에 부활하셨고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사람은 죄가 있으면 부활하지 않고 죄가 없으면 부활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기에 그 씨가 뿌려진 대로 부활로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으니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니이다.(행24:15)
선을 행한 자들은 생명의 부활로, 악을 행한 자들은 정죄의 부활로 나오리라.(요5:29)
그러므로 사람의 육체적 죽음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정해져 있는 것이다. 죄의 삵은 사망이라는 말은 육체적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씨가 사람에게 뿌려져야 하는데 사탄의 씨가 뿌려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생명이시다.(요14:6) 그러면 사망은 누구인가? 사탄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우리의 상식의 수준으로 우리의 육체의 죽음을 사망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멸망 받을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니라.’(고전15:26)라는 말이 있다. 여기서 사망을 인격적인 존재로 말하고 있다. 우리의 원수는 누구인가? 당연히 사탄이다. 사탄은 누구인가? 사망의 씨-조상이다. 생명의 조상은 누구인가? 당연히 예수님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단순하게 사망을 사람의 육체적 죽음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성경은 우리의 육체적 죽음도 사망이라고 기록하기도 한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을 말할 때는 그 문맥으로 보아 명확히 알 수 있다. 그 외 사망이라는 말씀은 육체적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고 있다. 흙-사람 안에 하나님의 씨가 심겨지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연결되어 생명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씨가 심겨지면 하나님과의 연결이 끊어진 것으로 사망(사탄)의 지배 아래 있는 것이다. 그 씨가 뿌려지면 그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래서 사탄의 씨가 뿌려지면 사탄의 자식으로,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면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짓는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과 함께 일하는 일꾼이요, 너희는 하나님의 농사요, (고전3:9)
우리는 죄라는 관념 때문에 육체적 죽음이 온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육체적 죽음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부활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이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죄는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완전히 용서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부활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부활을 위해 한번은 육체를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용광로에는 좋은 철이든 고철이든 어떤 철이 들어가도 똑 같이 녹아버린다. 이와 똑 같은 원리다. 여기에 생명의 원리가 있다. 레위기에 보면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물은 우리 자신의 인격을 상징하는데 희생물과 헌물로 두 종류다. 희생물은 죄로 인해 드려야 하는 것이고, 헌물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 드리는 제물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두 제물의 공통점은 모두 죽음을 통해 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죄가 없다면 우리의 육체가 죽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헌물로 창조되었는데 죄라는 장애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우선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레위기에 보면 사람이 죄와 관계없이 드리는 헌물이 음식헌물인데 이는 사람이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음식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음식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흙-육신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표는 단순히 사람이 흙-육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흙-육신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육은 죄가 있든 없든 어차피 육이지 육은 생명이 아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에게서 난 것이 영-생명이다.(요3:6) 육은 무엇을 해도 육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우리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적 생명에 하나님의 생명이 이식되어야 하는 것이다. 이 생명의 연합의 원리에 대해서는 ‘클라렌스 라킨’의 글을 인용해 보자.
‘자연적으로 생명이 출생하는 것은 없다. 모든 생명은 앞서 존재한 생명으로부터 나와야 한다. 죽은 돌은 스스로 무기적 상태에서 유기적 상태로 전환될 수 없다. 두 세계 사이에는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유기적 상태 쪽으로 열려 있다. 돌은 스스로 문을 열수 없는 반면 식물은 그 문을 열 수 있다. 식물은 그 뿌리를 흙 속으로 밀어 넣어 돌을 부술 수 있으며 돌의 화학적 요소들을 취하여 식물의 생명으로 전환되게 한다. 이와 같이 식물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도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이 문은 동물의 세계 쪽으로 열려 있다. 식물은 스스로 육이 될 수 없으나 동물은 식물을 먹음으로 식물적 생명을 동물적 생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이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에도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이 문은 육 쪽에서 열 수가 없다. 영의 세계 쪽으로 문이 열려 있다.’
즉,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이 되려면 높은 생명 쪽으로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낮은 생명은 죽음을 통해 높은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 만일 사람만이 특별한 존재라서 창조 시에 죽지 않는 영생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롬1:20) 라는 말씀이 이 말이다. 단지 만물을 보고 ‘아 하나님은 계시네’ 이것을 알라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알라는 것이다. 육은 육이지 영-생명이 아니다.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에 연합되려면 반드시 죽음을 통해 연합되는 것이다. 식물이 동물에게 삼켜져 동물이 되듯이 육-사람은 헌물로서 영-하나님께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고전15: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mortality)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5:4)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위 말씀도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서 육신에 대하여 ‘죽을 것(mortal)’ 으로 번역한 영어 mortal 은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죽을 운명(mortal) 이라는 것이다. ‘사망이 승리 가운데 삼켜진다’(고전15:54) 라는 말씀은 ‘죽을 운명(mortality)인 육신이 하나님- 생명에 삼켜진다’(고전후5:4) 는 의미다.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음식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죽게 만들었다고 해서 사망이 아니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이 사망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죽을 것(mortality)이 생명에게 삼켜지는 것이다.’(고후5:4) 그런데 여기에 죄가 들어왔다. 그래서 어차피 한 번 죽을 운명(mortality)이었던 몸이 사망(death)의 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조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의 조상인 사탄에게 십자가에서 인격으로 승리하였다. 그래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게 함이라’(고후5:4)는 말을 ‘사망이 승리가운데 삼켜지리라’(고전15:54)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 죽지 않을 몸인데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인생이 죽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사람은 어차피 하나님께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수님의 죽음은 단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서만 죽으신 것이 아니라 우리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재 죄를 대속받은 그리스도인의 육체가 죽는 것은 죄로 인한 희생물로서 죽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근원적인 헌물로서 죽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렀도다.(딤후4:6)
그러니까 ‘침례’ 곧 죽음은 죄가 있건 없건 흙-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다. 침례-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죄 없으신 분이시다. 그럼에도 그분도 이 땅에 오셔서 침례를 받으셨다.(마3:16) 곧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위치를 인정하신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사탄이 ‘너희가 절대로 죽지 아니하리라.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창3:4~5) 라는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 사람에게 육체의 죽음은 정해져 있는데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보라 매우 좋았더라.‘(창1:31) 하시면서 매우 만족하시고 안식하였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하나님의 안식은 깨지고 말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으로서 하나님 앞에 죽음(침례)를 발표함으로 흙-인생의 위치를 지키자 씨-하나님께서 기뻐하셨다.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마3:17)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깨져버린 하나님의 안식이 예수님으로 인해 회복되신 것이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단지 우리의 죄만을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오신 궁극적인 목적은 우리에게 부활생명을 주기 위해 오신 것이다. 죄란 단지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데 사탄이 설치해 놓은 하나의 장애물로서 제거해야 할 대상에 불과한 것이다. 인생은 본디 죄가 없어도 영원한 생명을 위해 그리스도 안에서 침례는 정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그리스도 안에서의 침례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정해진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침례를 받은 우리가 다 그분의 죽음 안으로 침례를 받은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롬6:3)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는 원래 그리스도 안에서의 침례만 있었는데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사탄 안에서의 침례가 들어온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침례를 받은 자는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 안에서 침례를 받은 자는 불의한 자의 부활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고린도전서 15장 29절 말씀의 의미를 다시 살펴보자.
그렇지 아니하여 만일 죽은 자들이 결코 일어나지 아니한다면 죽은 자들로 인하여 침례를 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그러할진대 그들이 어찌하여 죽은 자들로 인하여 침례를 받느냐?(고전15:29)
바울이 이 말을 하게 된 배경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는 사람들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앞에서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셨다고 선포하였거늘 어찌하여 너희 가운데 어떤 자들은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말하느냐?’(고전15:12) 하면서 ‘만일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께서 일어나지 아니하셨느니라.’(고전15:13) 했다.
즉 죽은 자들의 부활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여기서 예수님이 죄가 없기 때문에 부활했다, 또는 하나님이기 때문에 부활했다 하지 않고 죽은 자의 부활은 죄가 있든 없든 원래부터 정해져 있다는 것이다. 즉 의로운 자의 부활과 불의한 자의 부활이 정해져 있는데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의로운 자의 첫 번째 부활-열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15:20)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사람에게 침례는 정해져 있는 것이다. 원래 사람이 죄가 없었더라도 부활을 위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원래 영생이 없는 자였다. 영생을 위해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했다.(창3:22)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영생을 위해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생명의 연결자를 통해 영생을 얻는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2:5)
그러나 우리 인생은 모두 아담의 타락으로 죽은 자들이 되었다.(엡2:1) 즉 사탄 안에서 침례 받은 자들이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돌이켜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 안으로 돌이켜야 한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는 두 가지 방면이 있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 되심과 우리의 생명을 주시기 위한 헌물되심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장 29절에서 ‘죽은 자들로 인하여 침례를 받는다’ 의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침례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죽은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물 되심으로 죄를 대속받고, (대속받았으니 죄가 없기에)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헌물되심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부활한다는 것이다. 희생물이 법리적인 위치라면 헌물은 유기적인 위치다. 원래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살아 있는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죽은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침례를 받아야 하는 것이다. 아담이래 사람의 운명은 '죽은 자'로 태어나고 그리스도와 연합하여 함께 죽어야 함께 사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함께 심겼으면 또한 그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 6:15)
요약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이 육신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육신을 벗고 부활된 몸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침례(죽음)이 없으면 부활이 없기 때문에 사람의 침례(죽음)은 죄와 관계없이 정해진 것이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근원적으로 영원한 생명이 없었기에 영원한 생명을 위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했다.(창3:22)
그러므로 사람은 근원적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하나님과 사람사이의 생명의 연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딤전2:5)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사람은 죄가 없었더라도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는 자로 그리스도 안에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죄가 들어왔기에 죽은 자로서 그리스도 안에서 침례를 받아야 한다. 침례가 없다면 부활이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