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방언

올더스조에 2012. 3. 17. 12:59




어제(3.11) 목사님 말씀의 주제는 방언이 왜 성경적으로 비성경적인 것인가 하는 내용이었다. 물론 개인적으로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새롭게 생각나는 것이 있어 몇자 적어 본다.

소위 기독교계에서 말하는 방언에 대해 성경은 천사의 언어도, 천상의 언어도 아닌 말 그대로 어떤 지역의 언어(tongues)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소위 알지도 못하고 해석도 안되는 천상의 언어(?) 라고 하는 방언을 사모하는 것일까?


1. 인간의 모든 문제는 하나다.

이것은 사실 창세기 3장에서 발원한다. 인간의 문제가 많은 것 같지만 성경은 단 한 가지라고 말한다. 우리가 병이 생기면 병의 근원을 치료하지 않고 나타난 현상만 치료하면 또다시 병이 재발한다. 특히 암이 그렇지 않은가? 대부분 암을 수술해서 떼어 버렸다해도 그 근원이 치료되지 않았다면 언젠가는 재발할 것이다. 세상의 식자들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각자 자신의 대책을 내세우지만 성경은 세상이건 종교이건 인간의 모든 문제는 단 하나이고 치료 방법도 단 하나라고 말한다.

성경은 인간의 모든 문제가 신들과 같이 되기 위해 선악과를 먹은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사실 아담은 인간의 제한된 육신의 본성을 초월하여 신들(천사들)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이다.


2. 종교와 세상의 최종목표도 동일하게 하나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 자손들의 결과는 창세기 11장의 바벨탑 사건에서 극대화 된다. 그들의 슬로건은 이름을 내자, 높이 오르자, 뭉치자이다. 선악과를 먹고 타락한 아담의 자손들의 최종목표는 종교적으로는 거인(네피림)들, 곧 신들(천사들)이 되고 싶어 하고, 세상 안에서는 대통령, 곧 왕(신)이 되고 싶어 한다. 종교와 세상(정치)의 목표는 동일하다. 주님이 오셨을 때 세상의 왕인 헤롯과 종교의 왕인 유대교 대제사장은 야합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다. 다 선악과를 먹은 사람의 결과다. 성경은 창세기 11장에서 씨가 뿌려진 바벨론이 계시록 17, 18장에서 가서 종교적 큰 바벨론과 정치적 큰 바벨론으로 열매를 맺고 종국적으로 멸망당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소위 기독교계에서 행해지고 있는 은사주의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사실은 신들(천사들) 숭배다. 천사숭배는 모든 종교의 동일 목표다. 기독교, 이슬람, 불교, 심지어 무당, 기타 세상에 여러 형태로 존재하는 종교들을 보라. 그들의 목표는 신들이 되고 싶어 하는 것이다. 또 세상에 존재하는 스포츠와 문학, 영화들을 보라. 거의 대부분이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뛰어 넘는 것을 칭송하고 있다. 이방종교에서 유래한 올림픽의 슬로건이 더 멀리, 더 높이, 더 빨리라는 것인데 다 인간의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신들을 부러워하는 것이다.


3. 선악과를 먹은 모든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죽고 다시 살아야 한다. (창2:17)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오셔서 육신으로 계셨을 때 오병이어의 기적과 물위를 걷는 기적등 수많은 기적을 보이셨다. 죽은 사람도 살리시고 병든 자를 고치셨다. 아담 안에서 그분은 모든 사람들이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보기에 아름다운 신(하나님 아들)과 같은 분이었다. 그러나 그분이 십자가에 매달리셨을 때 신과 같던 그분의 모습은 끝이 나버렸다. 신과 같던 옛 모습(아담이 그렇게 부러워 하던 모습)은 끝났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창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

사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고난, 희생보다는 끝냄과 시작이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다.(롬 5:14) 모형이란 모델하우스와 같은 개념이다. 모델하우스의 역할은 실제 아파트가 지어면 임무를 다하고 철거한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아담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허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은 아담은 죄가 있건 없건 마지막 아담이신 예수님이 오면 허물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아담 안에는 원래부터 영생이 없는 모형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실제이자 영생의 씨로 오신 예수님이 오면 그 임무는 끝나는 것이다.  바로 그 임무가 끝나는 지점이 십자가다.  예수님은 바로 십자가에서 마지막 아담으로서 아담의 임무를 끝낸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 안에서 옛창조가 끝나고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지점은 오병이어의 기적도 아니고 물위로 걸어가신 지점도 아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속(원위치)하셨다.


4. 인간의 문제는 인간의 위치를 버리고 신들이 되고 싶어 한 것이었므로 다시 인간의 위치를 회복하는 것만이 해답이다.


예수님은 마지막 아담으로서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워하는 모습(하나님의 아들-정작 예수님은 자신을 항상 '사람의 아들'이라 칭하셨다)으로 오셨다. 그러나 그러한 분도 이것을 먹는 날에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했던 하나님의 말씀안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당시 종교 안에서 신들과 같은 능력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예수님의 인격보다는 능력만을 보고 추종했다. 아마도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뛰어 내릴 수 있는 분으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자 제자들은 허탈하여 다 흩어졌던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적인 면 보다는 능력적인 면에 초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영생의 양식은 내 살과 피다(요6:53)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인격이라는 것이다. 이 말씀을 듣고 신들이 되고 싶던 많은 사람이 실족하여 예수님을 떠났다.(요6:66)


5. 예수님은 사람으로 오셨다. (딤전2:5)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의 살과 피가 없는 신적인 예수만을 강조하고 신이라고 하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이야기 한다. 종교안의 모든 문제가 여기서 발생한다. 육체를 초월한 무언가를 추구하려고 하는 것이다. 몰몬교도 그렇고 새로운 종교가 일어날 때 마다 기적을 이야기하곤 한다. 거기에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는 없고 전부 황당무계한 것만 난무한다. 무당들의 말이 황당무계해지는 이유는 살과 피가 없이 어떤 황홀경에 들어간 것이니까 살과 피가 있는 우리 인생에게는 황당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무당이 작도(斫刀) 위에서 춤을 춘다는 것은 제 정신이 아니다. 사실 알고 보면 살과 피가 춤을 추는 것이 아니다. 살과 피를 가진 인생으로서는 작도 위에서 춤을 출 수가 없다. 그 때는 완전히 살과 피가 그냥 없어져버리고 영인지 혼인지 좌우지간 모르겠지만 그것이 날아다니는 것이지 살과 피가 작도 위에서 어떻게 춤을 추겠는가! 이런 것들이 종교에서 신비가 된다.


수십 년을 눕지 않고 면벽수도를 하거나, 밤을 새워 알지 못하는 말로 소위 방언을 하거나 이런 것은 다 살과 피를 초월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육신이라는 제한을 가진 사람으로 창조했지 사람을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을 가진 천사로 창조하지 않았다. 아담의 타락은 사람이 천사의 능력을 부러워하여 사람의 위치(인격)을 이탈한 것이다.



사실 우주안의 가장 큰 비밀은 사람이 누구냐라는 것이다.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은 사람의 원형을 볼 수 없었다. 그래서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은 사람 이상인 신의 위치에 오르려고 하던지 사람 이하의 짐승이 되려고 한다. 세상을 보라. 사람은 없고 신들과 짐승들만 있다. 과거에 왕들은 신들이라 불렸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을 향하여 짐승이라고 부른다. 만일 예수님 당시에 사람들이 참 사람이 었다면 참 사람을 죽일수 있었겠는가? 사람이 어찌 사람을 죽이겠는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참 사람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다.



6. 사람의 위치를 구속(원위치)한 지점은 십자가다.

하나님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실 때 마다 보시기에 좋다라고 하셨다. 단지 만물의 격을 보고 좋다라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하신 것도 사람이 위대한 일을 해서 그런 것이 아니라, 단지 그 위치를 보고 보시기에 매우 좋다라고 하신 것이다. 부부가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으면 그 아기가 무슨일 해서 사랑스러운가? 그렇지 않다. 그냥 그 자체로 보기에 좋고 사랑스러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그 위치를 다시 회복해야 한다. 그 위치는 창세기 2장 7절의 흙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단지 흙이라는 위치로 돌아가서 다시 시작해야 한다. 그곳이 바로 십자가다. 이것을 구속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여기시는 것이다. 의(義)라는 의미가 히브리어로 ‘하나님 앞에 바른 위치에 서다’라는 의미다.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인 선악의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위치를 이탈했음으로 원위치로 돌아가면 그것이 의(義)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과 죄사함은 동일한 의미다. 구속 따로 죄사함 따로가 아니다. 바른 위치에 있으면 죄가 없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구속이란 신들이 되고 싶어 이탈했던 우리의 인격을 회복했다는 의미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찌하든지 우리는 회복된 우리의 인간성을 유지하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7. 사탄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지만 십자가에서는 죽을 수 없다.

사탄은 본래 타락한 천사임으로 능력 면에서 하나님의 거의 모든 면을 흉내 낼 수 있다. 사탄은 성경 말씀을 가지고 예언하고 설교도 할 수 있고 많은 표적과 이적을 행할 수 있다(살후 2:9-10) 그러나 사탄이 한 가지 못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는 것이다. 사탄은 영적 피조물이기에 육체가 죽을 수 없다. 우리를 구속할 수 없다. 살과 피를 가지신 예수 그리스도만이 육체를 가진 인간을 구속하실 수 있다.

소위 세상적인 스펙으로 보면 예수님은 석가모니나 공자보다 못할 수도 있다. 그들의 경력은 얼마나 화려한가. 얼마나 위대한가?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의 최고봉에 이른 사람들이다. 예수님은 위대한 분이 아니라 우리를 구속하신 분이다. 세상의 소위 성인들은 위대할지는 몰라도 우리를 구속할 수는 없다. 여기에 차이가 있는 것이다.


8.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목표와 방향)은 그리스도라는 인격(사람)이다.

지금도 종교안의 거목들은 위대한 자(신들)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목표와 방향이 틀린 것이다. 반대방향이다. 그래서 종교와 복음은 하늘과 땅만큼 다른 방향이다.

그날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이르기를,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대언하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마귀들을 내쫓지 아니하였나이까? 주의 이름으로 많은 놀라운 일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하리라. (마7:22-23)


나는 이 사람들이 자신들 스스로는 분명 예수를 믿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라고 여긴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목표와 방향)에서 빗나간 사람들이다. 죄란 무엇인가? 과녁을 빗나가다. 즉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말한다. 하나님께서 목표로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이러한 것은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선악과를 먹은 사람의 결과다.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던 사람이 하나님의 목표 안에 들어오려면 반드시 십자가에서 죽고 새사람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은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인격)을 표현하는 자로 지으신 것이다. 예수그리스도라는 인격만이 하나님의 목적안에서 유용하다. 그 외는 다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이것을 죄라고 하는데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말한다.


9. 마지막 날들에 아들로 말씀하시는 하나님(히1:2)

지나간 때에는 여러 시대에 다양한 방식으로 대언자들을 통하여 조상들에게 말씀하신 하나님께서 이 마지막 날들에는 자신의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며 그분을 모든 것의 상속자로 정하시고 또 그분으로 말미암아 세상들을 만드셨느니라. (히1:1-2)

하나님은 영시기에 사람에게 직접 말씀하실 수 없고 또 사람이 알아 들을 수 없다. 그래서 어떤 중개가 필요하다. 구약시대에서는 불기둥과 구름기둥, 표적과 기적, 환상과 꿈, 천사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의사를 사람들에게 전하여 왔다. 그러나 그것은 완전한 것이 못되었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지 못하셨다. 사람은 사람으로 말하여만 가장 잘 알아 들 수 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자 하나님은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마3:17)하셨다. 이분을 통하여 하나님이 충만히 표현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도가 사람이신 예수님을 통하여 사람들에게 전하여 진 것이다. 사람은 사람으로 말하여야만 잘 알아 들을 수 있다. 만일 구약시대와 같은 방법으로도 하나님의 의도가 충족되었다면 예수님은 오실 필요가 없는 것이다.


과거 태평양의 괌에서 일본군이었던 사람이 일본이 패망하고 전쟁이 끝난지 30년이 지났음에도 알지 못한 채 밀림에서 발견된 사례가 있었다. 지금은 예수시대다. 아들의 인격의 시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시대로 돌아가겠다는 것은 자동차시대에 자신은 달구지를 타는 시대로 돌아가겠다는 의미다. 그러한 시대는 이미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다 지나갔다. 구약시대는 하나의 모형이고 생명이 없는 시대다. 신약은 실제이신 예수님이 오신 시대다. 새로운 시대, 훨씬 더 좋은시대, 지나간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는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뀐 시대가 왔는데 아직도 옛시대의 생명없는 그림만을 붙들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10. 목표와 방향을 제대로 잡고 가자

왜 사탄을 향하여 성경이 혼동(confusion)이라고 하는지 이해하자. 하나님의 목표와 방향을 혼동하게 하는 것이 사탄의 술책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제대로 알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우리가 어디쯤 와 있는지 알고 가자. 하나님은 출발선을 지나 백두산 방향으로 가고 계신데 나는 한라산 방향으로 가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 보아야 한다. 우리는 속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목표와 방향이 중요하다. 그리스도와 교회가 목표다. 곧 하나님께 말썽꾸러기였던 아담은 십자가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다시 산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이루어진 인격적인 사회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이다.

그럼으로 우리가 버렸던 인격을 회복(구속)하신 예수를 믿는 다는 것은 특별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다. 소위 신령한(?)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편안함을 느낀다. 세상은 노력하는 곳이다. 땀을 흘리는 곳이다(창3:19). 그러나 교회(하나님 나라)는 땀 흘리는 곳이 아니다. 단지 힘 빼고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분안에 내가 포함되어 있구나 라고 여기면 된다. 그분만이 우리를 포함하여 죽으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