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연구

지식(知識, 창2:9)

올더스조에 2012. 3. 17. 12:57

성경에서 지식이라는 단어가 처음 등장하는 곳은 창세기 2장 9절의 ‘선악을 알게하는 나무’(the tree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 선악의 지식나무)에서 등장한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분야의 전문가, 또는 지식이 많은 사람을 박사라고 부르곤 한다. 그런데 성경은 이 지식(知識)이라는 단어를 처음 사용할 때 선악의 지식나무에 사용함으로서 사탄과 관련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아담은 선악의 지식나무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였고, 현재 세상은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은 아담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곳이다. ‘선악의 지식’이란 단어가 말하듯이 선악은 도덕을 말하는 것이고, 지식은 능력을 표현한다.

그러니까 현 세상은 도덕과 능력이 가치척도의 기준이 된다. 세상에서는 지식이 많은 사람을 다들 부러워한다. 그런데 묘하게도 성경과 세상은 반대다. 그렇다고 도덕이 나쁘고 능력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본래 아버지와 아들의 세계인 하나의 나라만을 창조하셨다. 그러나 사탄이 아담을 유혹하여 선악과를 먹게 함으로서 아담이 하나님의 목적으로부터 이탈하여 사탄의 나라를 형성하게 된 것이다. 즉 현재적으로 하나님의 왕국과 그에 대립되는 사탄의 왕국이 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이 사탄의 왕국을 멸하고 원래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할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사탄의 왕국은 선악의 지식나무를 먹은 세계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나무를 먹은 세계이다.

 

우리는 항상 이 두 나라에 대한 영역개념을 명확히 해야 헷갈리지 않는다. 이 개념이 불분명하면 성경에 계시되어 있는 하나님의 왕국에 속한 것을 이 세상에 적용시키게 된다. 현재 대부분의 소위 기독교계에서는 그렇게 적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기독교인들은 세상을 변화시켜야한다. 개선시켜야한다 등 여러 말을 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도시를 성시화하여 하나님께 바치겠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라고 말씀하시지 않는다. 단지 세상에 동화되지 말라고 하신다.(롬12:2) 세상 곧 사탄의 왕국과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자체가 틀리기 때문에 변화와 개선의 대상이 아니다. 세상은 아무리 발전하고 개선시켜 보았자 큰 바벨론으로 결말이 난다(계17, 18장)

 

세상은 사탄의 상징인 사자가 통치하는 곳이고 하나님의 왕국은 어린양이 통치하는 곳이다. 사자와 어린양은 생명자체가 틀린데 어떻게 사자를 어린양으로 만들 수 있겠는가? 씨 자체가 틀리기 때문에 있을 수 없다. 사자를 교화하여 어린양의 흉내를 내도록 하겠다는 의도가 종교와 도덕이다. 그러나 결국 사자는 배가 고프면 어린양을 잡아 먹는다. 생명이 그렇게 지어졌기 때문이다.

 

우리는 옛사람 안에서 모두 선악의 지식나무 열매를 먹은 사람이다. 그래서 사람을 보는 관점이 도덕과 능력위주로 본다. 계시록에 나오는 큰 바벨론은 지식의 극대화, 능력이 극대화된 사회다. 현재 세상은 바로 이 노선으로 치닫고 있다.

 

일반적으로 선악을 아는 지식이 좋은 것 같다. 그런데 왜 성경은 이것을 사탄의 노선으로 규정하고 있을까? 이것을 알려면 교회생활을 보면 알 수 있다. 교회안에서 형제 자매들을 선악을 아는 지식을 가지고 판단하면 분란이 일어난다. 교회 안에서 형제들을 판단하는 것은 나는 너보다 선하다는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의 관념이다. 세상의 관념을 교회에 그대로 적용시키는 것이다. 사탄의 왕국의 관념을 하나님의 왕국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교회다. 교회는 생명나무,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의 인격의 연합체다. 여기에는 그리스도 외의 다른 생명이 들어 올 수 없는 곳이다.

 

성경을 아는 지식, 언듯 보면 좋은 것 같지만 사실 알수록 두려움을 가져야 한다. 성경은 구구절절 지식인들에 대하여 경고하고 있다. 소위 지식인들이 왜 구원받기가 어려운지 선악의 지식나무란 어원 속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한다.

 

사실 성경에서 무엇을 안다(know)라는 의미는 부부간의 연합에 처음 사용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무엇을 안다는 의미는 내가 예수님과의 연합, 곧 닮는다는 의미다. 성경 몇장 몇절을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 당시에 소위 지식인들인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성경을 다 외우다시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들을 향하여 ‘독사의 자식들, 회칠한자의 무덤들’이라는 독설을 하셨다.

 

킹제임스 성경을 사용하는 독립침례교회가 우리나라에 설립된지 십 수년이 지났다. 그동안 긍정적인 면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부정적인 면도 있다. 혹 우리가 다른 진영에 있는 사람들 보다 바른 성경을 가지고 있고, 성경을 조금 더 안다고 다른 사람들을 은연중에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성경구절 몇구절을 인터넷 게시판에 띄어 놓고 자신들만이 성경의 모든 진리를 부여잡고, 자신들만이 구원받은 사람처럼 행세하고 타인들은 무시하지는 않았는지?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자신들만이 성경의 진리를 붙잡고 있었지만 그들에게는 소용이 없었다.

 

그들이 말씀을 먹고 소화해서 피가 되고 살이 되어 그들의 생명이 되어야 하는데 그냥 지식으로 알았지 인격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콩을 먹는다고 하자, 그 콩을 씹지 않고 그냥 먹으면 나중에 뒤로는 콩 그대로 나온다. 전혀 자신에게 도움이 안 된 것이다.

 

하나님이 인생을 창조하신 목적은 무엇인가? 우리가 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되는 것이다. 지금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셨을까? 지금 킹제임스 성경 진영에 있는 사람들처럼 하셨을까? 매일 교리만을 붙들고 무엇이 옳으니 그르니에 목표를 두었을까? 주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러 오셨지 교리를 주러 오시지 않았다. 생명 안에는 교리가 다 포함되어 있다. 교리란 생명을 이론화 시킨 것이다. 물고기의 생명을 이론화시킨다고 해서 물고기 되는가? 안된다. 우리는 생명을 붙잡아야 한다. 아들이 있는 자는 생명이 있고 아들이 없는 자는 생명이 없다(요일 5:12) 아들은 인격이다. 교리가 아니다. 우리는 방향을 분명히 알고 걸어야 한다. 지금 킹제임스 성경진영의 가장 큰 문제는 향방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이 개인적으로는 그리스도라는 인격이고, 단체적으로 이 인격의 연합체가 교회다. 우리는 이 방향으로 가야한다. 하나님의 목적이 뚜렷한데 피조물인 우리가 목적이 있을 수 없다.

 

소위 거듭났다. 구원을 받았다들 말하면서 지옥불에 건짐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이 없고 천당만 있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우리가 주님을 믿는 목적은 구원인가? 아니다. 예수님이라는 인격이다. 천당만 있고 예수님이 없다면 본질에서 벗어난 것이다. 우리는 통상 구원을 환경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구원은 나 자신의 존재적인 생명의 변화다. 인격적인 것이고 영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목표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그래서 성경은 이 목적에서 빗나간 것을 죄라고 한다. 그러므로 진정한 구원은 장소개념이 아니고 인격적이고 영적인 것으로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들어 온 것이다. 구원은 멸망상태에서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옮겨지는 것이다.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날뛰고 다녀도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되었다면 그것은 구원이 아니다(마7:21). 사람들은 지옥에서 천당가는 것을 구원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의 경륜과는 상관없는 일이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지어진 인간이 멸망상태에서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들어 온 것이 구원이다. 펄펄 끓는 기름가마에서 꽃피는 천당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하고 있던 인간을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되돌아오게 하는 것이 구원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이 구원을 받은 사람이다.

 

단순하게 성경지식을 많이 아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척도가  아니다. 우리가 성경을 아무리 많이 안다고 해도 사탄만큼 알 수가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인격이 변화되지 않은 자가 성경을 많이 아는 것은 강도에게 칼을 쥐어는 꼴이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생명없이도 얼마든지 성경박사도 될 수도 있고 성경 번역도 할 수 있다. 지식은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 이것은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는 것,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조성되어 그리스도를 사는 것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